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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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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잡초(雜草) 2021-08-01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온실의 환경에 익숙해 있기에 온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여름철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운 겨울 보온을 해주는 온실의 보호막이 있기에 화초는 살 수 있습니다. 화초는 온실의 보호막이 없어지면 시들해지고 결국 죽게 됩니다. 하지만 잡초(雜草)는 자라가는 환경을 누가 마련해주지 않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잡초입니다. 사전에서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설명합니다. 잡초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번식해갑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때 잡초는 뽑고 뽑아도 계속해서 자라기에 골치를 아파합니다. 최근에는 잡초를 제거하려고 아예 밭고랑에 비닐을 덮어버립니다. 잡초의 무한한 생명력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용혜원 시인은 <잡초>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아도 / 서성거리기보다는 /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하기에 / 살아야겠다는 열망으로 / 생명의 줄을 이어갑니다. / 이름 모를 꽃이 피어도 / 누구든 사랑해 주면 / 한동안의 행복도 가져 보지만 / 떠가는 구름이 / 한줄기 비라도 / 쏟아 놓으면 / 그보다 더한 행복이 / 어디에 있겠습니까? / 버려진 땅에서도 / 진한 목숨만은 / 어찌할 수 없어 / 언제든 오신다면 / 쉬어갈 자리는 / 비워 놓겠습니다.>
잡초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는 꿋꿋함과,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걷어차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올라오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잡초의 무한한 생명력은 작은 고난에도 쉽게 포기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환경을 탓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80평생 인생 여정길을 가는 동안 온실처럼 언제나 평안하고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비바람이 부는 사나운 날씨와 같은 시련과 역경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길은 어떠한 환경에도 꿋꿋하게 자라는 잡초처럼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욥24:16)
320정약용, 정약전 선생의 삶 2021-07-25
조선 후기 실학자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선생은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에서 출생하여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과거시험을 준비했습니다. 22살에 벼슬길에 오르면서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정조의 수원 능행길에 한강에 배다리를 놓았으며 수원성을 설계하여 증축하는 일을 하면서 기중기 등 과학적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였던 이벽, 이승훈 등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변화를 촉구하며 실천을 중요시하는 실학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정치적으로 실권하여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특히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16년 동안 유배지에서 보냅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사의재, 다산초당, 보은산방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손병조, 황상, 황지초, 이청 등이 있습니다. 1818년 57세로 유배지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는 1836년까지 정약용선생은 수많은 책을 저술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저술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1758-1816)은 천주교 신자로 1801년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 1816년 5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흑산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특히 해양생태학 서적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흑산도 어류의 분포도)를 저술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에 복성재(復性齋·사둔서당)를 세워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양반의 선비이든 천민의 어부이든 함께하며 서로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당시 흑산도 주민이 700여 명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오랜 세월 유배지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보은산방, 복성재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도 낙망하지 않고 부르심 소명의 삶에 충실합니다. 매일 매일을 충성스럽게 열정의 삶을 삽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319자존감(self-esteem) 2021-07-11
미국의 심리학자 머슬러(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주장합니다. 제1단계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제2단계 안전 욕구(Safety Needs), 제3단계 소속감과 애정 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제4단계 존경 욕구(Esteem Needs), 제5단계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입니다. 머슬러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려고 많은 노력들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는 일까지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존감(self-esteem)이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 가치 있고, 훌륭하고, 능력 있고, 매력 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타인으로부터 평가받기보다 먼저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감(self-esteem)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의성도 높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편하게 해 주기 때문에 좋은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반대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열등감이 있어 모든 일에 소극적이며 감정이 우울하며 불안하여 무의식적으로 자신이나 타인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학대 받거나 너는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부모로부터 듣고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존감이 낮은 상태가 되어 모든 일에 소극적이며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자존감이 낮은 경우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는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의 자녀이며,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이며, 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감정으로 당당하게 살겠다고 생각하는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318 조지 워싱턴 카버 – 역경을 이겨낸 사람 2021-07-04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는 1861년에 태어나 1943년까지 살다 간 미국의 흑인 식물학자이며 농업학자입니다. 그가 살던 당시에는 1863년 1월 1일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발표했지만 사회적으로 이를 수용하지는 못하고 여전히 흑인들을 차별하고 노예로 대하던 시대였습니다. 카버는 흑인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노예로 삶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분들을 만나 미네아 폴리스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후 계속 공부할 기회를 얻어 하이랜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배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노력 끝에 작은 농업실험실에서 꽃과 식물들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경험을 쌓았고 어렵게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카버는 당시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습니다. 카버는 재학시절 백인 학생들로부터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구내식당에서 쫓겨나는 인종차별을 받았지만 지도교수 조셉버드의 도움으로 1894년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학교 연구실에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카버는 일하며 공부하는 일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교회에서 흑인 농민들에게 양배추, 고구마 땅콩 등 식물 재배법을 지도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목화산업이 어려울 때 대체 작물로 땅콩을 재배하도록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땅콩의 풍년으로 재배한 땅콩을 전량 소비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땅콩으로 만들 수 있는 100가지가 넘는 제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는 땅콩버터, 땅콩음료수, 땅콩화장품 등 많은 제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인종차별의 고통과 모멸감을 참고 결국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렌스 엘리엇이 쓴 <땅콩박사-역경을 이겨낸 사람>이라는 그의 전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카버의 일생 전기의 제목이 말하듯이 <George Washington Carver-The Man Who Overcame> “극복해 낸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는 역경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카버의 전기는 인생의 꿈을 가져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주변 환경에 불평만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환경에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17라인홀드 니버 2021-06-27
라인홀드 니버(K. P Reinhold Niebuhr, 1892-1971)목사님은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현장을 살아간 목사님입니다. 니버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불의한 사회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 되며 눈을 감아서도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현실문제,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해서 깊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학공부는 세인트루이스의 이든 신학교와 예일 대학교에서 수학을 했으며, 23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15년부터 13년간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당시 디트로이트 지역은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서 목회하면서 산업화의 고도성장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늘진 사회를 목격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강제 퇴직당하는 실업자문제, 노동문제, 또한 산업화 현장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어 가는 모습들, 니버 목사님은 1928년까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개인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집단 이기주의 앞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문제 앞에 깊은 고뇌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유니온 신학교에서 윤리학을 강의하면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책을 1932년에 쓰게 됩니다. 니버 목사님의 기도문 중에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순간을 누리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우리가 한 번 깊이 생각할 기도문입니다.
물론 니버 목사님의 신학 사상 중 초월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하여 소홀히 여긴 점과 말년의 종교다원주의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버 목사님이 관심을 가졌던 부정직하고 불의한 현실 문제에 뛰어들어 바르게 바꾸라는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갈등문제, 정의와 공정, 그리고 평등에 대하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쯤 니버 목사님의 삶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우리 모두 현실 참여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봅시다.
316이윤영 목사의 기도문 2021-06-20
1948년 5월 31일 해방 후 제1회 대한민국 국회가 소집되었습니다.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작하자고 제안하여 이윤영 위원(목사)이 기도를 드립니다. 국회 속기록에 있는 당시 기도문을 한 번 기억해봅시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誠心)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 塗炭)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 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 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아멘.”
315목숨을 바칠 만한 일 2021-06-13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말 고갯길에 가면 6.25 전쟁 중에 맨몸으로 적의 탱크와 맞서 용감하게 싸운 11명의 육탄 용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당시 주음치리 말 고갯길은 홍천을 사수하기 위한 국군의 최후 방어 진지였습니다. 북한군은 소련제 SU-76 자주포, T-34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홍천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말 고갯길에서 11명의 육탄 용사는 맨몸으로 탱크에 접근하여 수류탄과 연막탄을 탱크 안으로 집어넣어 4대의 탱크를 파괴했고 6대의 탱크를 노획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이곳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제7사단의 남하를 저지하므로 북한군 전체의 작전에 차질을 가져 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감동의 육탄 용사 이야기는 황해도 개성의 송악산 고지에서도 있었습니다. 1949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빼앗겼던 서부 전선 개성의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10명의 육탄 용사들이 적의 진지의 토치카에 포탄을 가지고 맨몸으로 뛰어 고지를 탈환했습니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염산교회에는 6.25 전쟁 중에 순교한 77명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전쟁 당시 염산교회는 독립군 출신의 김방호목사님이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공산군이 지역을 점령하자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이 수복되고, 염산 지역에서도 국군이 들어오자 숨어 있던 청년들이 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그러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들이 나타나 엄청난 살인 보복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목에 돌을 매어 염산 앞바다에 밀어 넣는 잔인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77명의 순교자들은 이렇게 바다에 수장되면서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홍천의 말고개 전투의 11명의 육탄 용사, 개성의 송악산 고지의 10명의 육탄 용사 이들은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염산교회의 77명의 순교자들은 생명을 바쳐 지키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내 목숨을 바칠 만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요?
314고도원의 아침 편지 2021-06-06
저는 매일 아침 편지를 받습니다. 아침편지 문화재단에서 보내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이메일입니다. <아침 편지>는 여러 책에 나온 좋은 문장을 짧게 인용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아침에 묵상하기 좋은 문장들입니다. 아침편지를 보내는 고도원 선생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책 읽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고은석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가난한 시골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언제나 손에 책이 들려 있는 독서광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에게 책 읽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책 읽는 훈련으로 감동을 받은 문장에 줄을 치고, 독서카드를 작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고도원은 중학교 2학년 때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토인비의 <역사연구>을 읽고 감동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뷰한 글을 보니 그는 아버지 고은석 목사님으로부터 <책 읽는 것,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연세대학 신학과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대학신문 <연세춘추>의 편집장을 지냈고, 졸업 후 <뿌리 깊은 나무>잡지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 담당 비서관을 지냈습니다. 그가 대통령 연설문 담당 비서관이 되었다는 것은 글 쓰는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은 다독가이며 연설가이며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통령 밑에서 연설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독서의 힘이었습니다. 그 후 2001년 8월 1일 “희망이란” 제목의 아침편지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매일 아침 360만 명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글을 써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책 중에 감동 받은 문장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자신이 읽은 책 중에 감동 받은 문장을 남에게 알려 함께 감동 받자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주간에 묵상한 성경말씀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시21:1-2)
313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 2021-05-30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레이던(Leiden)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863년 헬더란드 주에 속한 작은 시골 마을 베이스트(Beest)교회에 청빙을 받아 26살에 목회를 시작합니다. 처음 목회지에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성도들의 변화의 모습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소수의 성도들은 카이퍼 목사님의 지식 중심의 자유주의 설교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카이퍼 목사님은 목회 현장에서 대학에서 배운 대로 설교하는 자신의 목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는 교회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고 성도들의 변화의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4년 동안 베이스트 교회에서의 목회 생활은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에게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던 평범한 시골교회의 소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을 만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의 일생에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4년 목회를 마친 후 1867년 베이스트 교회를 떠나 우트레흐트(utrecht)의 돔교회(domkerk)로 목회지를 옮겨갈 때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의 부임 초기에 행한 비복음적인 설교에 대해서 공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훗날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은 세계 3대(워필드. 바빙크, 카이퍼) 칼빈주의 신학자가 되었고, 정치인으로 총리를 지냈고, <자유대학>를 설립하는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초기 목회 현장에서 복음에 충만한 성도들의 만남이 카이퍼 목사님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카이퍼 목사님이 1908년에 쓴 <하나님께 가까이> 신앙의 명상록이 있습니다. 서문에서 이성주의에 대하여 말하길 이성주의는 끝이 눈부시게 투명한 아름다운 얼음 결정체라고 말하면서 얼음 밑에 흐르는 생수의 강줄기는 너무나 쉽게 말라버린다고 말합니다. 지식을 내세우는 이성주의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영혼을 살리는 생수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에게 삶에 대한 열정이 솟아나게 합니다. 이제 6월입니다. 대자연이 푸르른 녹음(綠陰)의 계절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지식 중심의 이성주의가 아닌 복음으로 충만하여 영혼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새로운 도전의 열망이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312하나되는 공동체 2021-05-23
한국장로교 역사를 보면 1885년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 1889년 호주 장로교회의 데이비드 선교사,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7인의 선발대, 1893년 캐나다 장로교회 맥켄지 선교사 등 4개의 장로교단의 선교사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으로 선교지역을 장로교, 감리교 그리고 4개의 장로교 교단이 지역을 나누어 선교를 했기에 큰 마찰은 없었습니다. (1)서울, 평양, 황해도, 충청도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역, (2)호남지역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역, (3)경상도 특히 경남과 부산은 호주 장로교 선교지역으로 (4)함경도, 만주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선교활동을 했으므로 한국교회는 4개의 장로교단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역은 나누어 활동을 했지만 서로 교류하면서 한국 장로교단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1901년 9월 한국 장로교는 하나로 한다는 큰 목적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한국 장로교단을 하나로 하기까지 문제가 많았지만 한국 장로교단을 하나로 한다는 큰 목적 아래 서로 양보하면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1907년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에게 첫 목사 안수를 할 때 이들을 어디 소속으로 하느냐 선교사들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1885년 첫 선교사가 들어온 후 22년 만에 목사 안수를 하는 일이기에 선교사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선교회 소속으로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사님들은 이 문제를 놓고 졸업하기 2년 전인 1905년부터 의논하며 기도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모두가 양보하여 7명의 목사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단이 하나로 출발하기까지 선교사님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장로교회는 사분오열되어 장로교 교단만 286개 교단이 등록되어 있는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선교 초기 4개 나라의 선교사들이 보여준 한국 장로교회를 하나로 하려는 노력과 기도하던 모습은 분열된 한국 장로교회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일에 조금씩 양보하여 분열하지 말고 어디서나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길 바랍니다.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소속된 기관에서 자신의 주장을 조금 양보하며 화해와 일치를 이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