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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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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함께 걷는 생명의 길" 2026-09-20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님은 혼자 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계산으로 움직였고, 관계는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였다. 그는 "혼자가 편하다"며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 고독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감옥이었다. 사랑도, 웃음도, 기쁨도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것은 차가운 동전 소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세 영혼이 그를 찾아왔다. 과거의 유령은 그가 잃어버린 따뜻함을 보여 주었고, 현재의 유령은 자신이 외면한 이웃의 웃음소리를 들려주었으며, 미래의 유령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쓸쓸한 무덤을 보여 주었다. 그는 통곡하며 외쳤다. "제발, 다시 살게 해 주시오. 이번엔 다르게 살겠습니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함께'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 영혼의 각성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생전 처음 이웃의 문을 두드리고, 가난한 자의 집을 찾아가 음식을 나누며 웃었다. 어제까지 그를 냉소하던 사람들조차 놀랐다. 스크루지는 깨달았다.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오래된 겨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성경도 같은 진리를 말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양은 혼자 길을 가지 않는다. 늘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고, 옆의 양들과 어깨를 맞대며 걸어간다. 광야를 지나는 무리 가운데 함께 있음이 곧 생명이다.

(9월 생명의 삶, 떠남의 시간)
581"삶을 비추는 등대" 2026-09-13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 길도, 만날 길도 없으며, 그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그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우리에게서 성경이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인생의 길을 잃게 됩니다. 방황은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다시 성경을 펴고 읽기 시작하면 예수께 돌아가게 되고, 방황을 멈추며, 성경 안에 감추어진 수많은 보물을 발견하도록 인도받게 됩니다.

J. C. 라일(John Charles Ryle)은 「믿음으로 살라」(복있는사람 역간)에서 성경 읽기를 강조하며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조금 응용해서 소개합니다.
“성경에 어려운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성경 읽기를 멈춘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에 어려운 것만 있습니까? 쉽고 분명한 것은 없습니까? 바다 위에 있을 때 어두운 밤에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해도, 항구 높은 곳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는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비추는 수많은 등대와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성경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읽는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당신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쉽고 분명한 말씀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어둠 속의 등대처럼 삶을 환히 비추는 말씀 또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할 때, 우리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더욱 발견하게 됩니다.

(9월 생명의 삶, 영혼을 빛나게 하는 여덟단어)
580"믿음의 결단" 2026-09-06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일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이 있다. 30세 때, 로스앤젤레스 전도 대회를 앞두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별히 나와 절친했던 찰스 템플턴(Charles Templeton)이 기독교를 떠나면서 '빌리, 자네는 50년이나 시대에 뒤져 있어. 이제는 아무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아. 자네 신앙은 너무 순박해'라고 한 말을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성경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씀에 내 인생을 완전히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해답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뒤졌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몸부림치면서 샌버나디노 산길을 걷다가 나는 마침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이 책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철학적, 심리학적 지식보다 믿음을 더 앞자리에 두겠습니다. 성경이 아버지의 말씀임을 믿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을 때, 지난 몇 달간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내 영혼에서 벌어졌던 영적 전투에서 내가 싸워 이겼음을 머리와 가슴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의심을 이기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단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잘했던 결정은 내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빌리 그레이엄이 된 순간이었다." 그는 이후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9월 생명의 삶, 예수를 만나다)
579"구별된 성도" 2026-08-30
그리스도인이란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불러낸 존재가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불러내셨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시고 그 영광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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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가톨릭교가 범한 오류가 있습니다. 가톨릭교에서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성인의 기준을 가지고 한 사람이 살았던 삶을 평가하여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추앙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신분을 그렇게 계급화한 대목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배격합니다. 빌립보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평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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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도 계급화 분위기가 적지 않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직분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의 달란트에 맞게 교회 공동체를 섬기라고 주신 직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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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장로, 권사 투표를 해서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크면 사람들의 섬김을 일일이 다 못 알아주기도 하고 못 보고 지나치는 경우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적어도 권사는 돼야 되는데...", "여태껏 집사밖에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가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스며들어 와 있는 세상적 계급 질서 의식을 분별하여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합니다.
578"인정함이러라" 2026-08-23
예루살렘 공회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 됨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마가 요한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심히 다투며 각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분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조차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나바를 통해 마가는 회복되었고, 바울은 디모데라는 평생의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더 굳건해지고, 그 수는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이어지는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세 번의 사인’을 받게 됩니다. 모두 자신의 뜻과는 다른 ‘가지 말라’는 사인이었습니다. 아시아로 가지 말라는 성령의 사인을 받았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지만, 예수의 영이 막으셨습니다.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단지 ‘가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멈추라’ 하실 때 멈출 수 있는 것도 순종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예비된 영혼을 통해, 빌립보와 유럽 교회의 시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머물면 길을 잃기 쉽지만,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순합니다. 그분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오늘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의 길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57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2026-08-09
사도행전 14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후반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 이고니온으로, 다시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이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박해’였습니다. 결국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깨어났고, 다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안에는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 성안에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복음의 우물을 팠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우물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계신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각자에게 맡겨진 우물을 파는 삶.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576"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2026-08-09
사도행전 13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분명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었지만, 동시에 시기와 반발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는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이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은 믿음이 인간의 선택이나 결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작정되다’는 표현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택을 가리키며, 그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와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믿게 된 이유는 나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장로교 신앙 전통에서 말하는 선택과 작정의 교리는 바로 이 진리를 붙드는 신앙 고백입니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갈리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신앙심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보다, 오히려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 저 사람은 믿지 않았는가”를 묻기보다,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575"그들에게서 떠나다" 2026-07-26
‘가나안 성도’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안나가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실망도 있고, 상처도 있고, 신앙의 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지 못한다고 느낄 때, 떠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떠난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신앙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했고, 계명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채우려 했지, 내려놓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또 한 명의 떠난 청년이 등장합니다.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동행했지만, 중간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선교의 고됨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바울은 냉철했고, 바나바는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마저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팀으로 나뉜 선교는 오히려 복음을 더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훗날 떠났던 마가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베드로를 따라다니며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마가는 그들에게서 떠났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회복의 뒤에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앞에 서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되기보다 요나단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 끝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74"분량대로" 2026-07-19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본받고 싶은 믿음의 사람들도 있고,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이 두 부류의 삶을 매우 분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권력과 인기를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 가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름 없이 사명을 감당하다 순교한 사도 야고보가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대를 이어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1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디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체면, 그리고 인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화려한 권세를 길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결국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단 한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그는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였지만,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전할 뿐입니다. 야고보는 늘 베드로와 요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다혈질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량을 알았고, 그 분량대로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의 모습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감옥에 갇힌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고,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신앙 공동체는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교할 이유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깨끗하게 준비되길 바랍니다.
573"처음과 같이" 2026-07-12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의 모습 앞에서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곤 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예배, 같은 하루가 계속될 때, 세상은 그것을 정체로 여기며 더 빠른 변화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반복은 ‘멈춤’이 아니라 ‘연단’이며, 그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에 있습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탁월함에 이른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연단은 성취나 결과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떠한 존재로 빚어지고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두십니다. 연단은 우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경험한 사건을 또 한 번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같은 환상과 같은 말씀, 그리고 같은 복음이 되풀이됩니다. 성경이 이를 반복하여 기록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복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아무리 반복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예수님의 이름이 자주 언급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이 생략될 때 찾아옵니다.
예배와 말씀, 그리고 봉사가 습관이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오늘의 본문은 중요한 도전을 전해 줍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행11:15)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과 같이 일하십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도,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은혜도,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도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 은혜는 반복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인생은 반복을 통해 성숙해 갑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신앙의 걸음을 이어 갑니다. 처음과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