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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5"그들에게서 떠나다" | 2026-07-26 |
| ‘가나안 성도’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안나가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실망도 있고, 상처도 있고, 신앙의 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지 못한다고 느낄 때, 떠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떠난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신앙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했고, 계명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채우려 했지, 내려놓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또 한 명의 떠난 청년이 등장합니다.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동행했지만, 중간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선교의 고됨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바울은 냉철했고, 바나바는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마저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팀으로 나뉜 선교는 오히려 복음을 더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훗날 떠났던 마가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베드로를 따라다니며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마가는 그들에게서 떠났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회복의 뒤에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앞에 서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되기보다 요나단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 끝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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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4"분량대로" | 2026-07-19 |
|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본받고 싶은 믿음의 사람들도 있고,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이 두 부류의 삶을 매우 분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권력과 인기를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 가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름 없이 사명을 감당하다 순교한 사도 야고보가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대를 이어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1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디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체면, 그리고 인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화려한 권세를 길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결국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단 한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그는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였지만,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전할 뿐입니다. 야고보는 늘 베드로와 요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다혈질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량을 알았고, 그 분량대로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의 모습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감옥에 갇힌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고,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신앙 공동체는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교할 이유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깨끗하게 준비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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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3"처음과 같이" | 2026-07-12 |
|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의 모습 앞에서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곤 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예배, 같은 하루가 계속될 때, 세상은 그것을 정체로 여기며 더 빠른 변화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반복은 ‘멈춤’이 아니라 ‘연단’이며, 그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에 있습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탁월함에 이른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연단은 성취나 결과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떠한 존재로 빚어지고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두십니다. 연단은 우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경험한 사건을 또 한 번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같은 환상과 같은 말씀, 그리고 같은 복음이 되풀이됩니다. 성경이 이를 반복하여 기록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복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아무리 반복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예수님의 이름이 자주 언급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이 생략될 때 찾아옵니다. 예배와 말씀, 그리고 봉사가 습관이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오늘의 본문은 중요한 도전을 전해 줍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행11:15)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과 같이 일하십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도,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은혜도,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도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 은혜는 반복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인생은 반복을 통해 성숙해 갑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신앙의 걸음을 이어 갑니다. 처음과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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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2"편견과 복음" | 2026-06-28 |
| 편견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시작되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성찰 없는 판단은 신앙 안에서도 큰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큰 흐름은 복음의 확장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나 자신이 가진 편견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갖는 선민의식, 예루살렘 중심의 신앙이 복음의 발걸음을 제한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그를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발걸음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에게는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세 번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환상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사도였지만,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합니다. 편견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만들고, 신앙을 후퇴시키며,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편견을 깨는 길은 분명합니다. 첫째,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고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겸손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시야를 여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끝으로, 복음입니다.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복음만이 모든 편견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편견을 깨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2026년 새해, 우리도 주님의 발 아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복음 안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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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1"달라지다" | 2026-06-21 |
| 사람들은 누구나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처럼, 보통 사람들도 날마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단순한 자기 계발이나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청년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변화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 사울은 ‘위협’과 ‘살기’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은 찾아오셨고, 만나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수를 만난 후에도 사울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다메섹에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도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지 역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결국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달라진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박해자였던 그는 제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주 안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고, 생활과 형편도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우리는 예수님 닮은 존재로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 했고, 제자들조차 그의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사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바나바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기도했고, 바나바는 그를 위로하고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울을 변화시킨 것은 정죄나 훈계가 아니라, ‘기도’와 ‘위로’였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된 변화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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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0"전적으로" | 2026-06-14 |
|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적으로’ 위협과 살기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조차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정의라고 확신하며 계속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울의 모습은 단순한 폭력적 성향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의 전형입니다. 인간은 단 1%의 선한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이며(롬 3:10-12),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하는 영적 무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주님은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사울은 그동안 자신이 박해했던 대상이 바로 주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그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청각, 시각, 미각, 감각 전체가 마비된 상태, 즉 전적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청년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는 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무능력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오직 주님이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곧 사울이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 우리는 혈기와 교만함으로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의 변화와 회복은 언제나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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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9"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 | 2026-06-07 |
|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다시 가사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가사로 향하는 길은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였습니다. 내시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방문 목적은 ‘(하나님께)예배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를 사모하는 자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빌립이 광야로 가서 내시를 만나게 된 이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행8:26) 빌립은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비된 한 영혼을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사모하는 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53장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본에 따르면 내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내시와는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Already)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Not yet) 달려가야 할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하여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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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8"하나님의 사인, 그리고 놀람과 회개" | 2026-05-31 |
| 초대교회에 많은 성령의 역사와 이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이방의 땅에서도 이러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가운데 부작용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마술사 시몬과(행 8장) 같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부와 인기를 얻고자 했던 것9820입니다. 그는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개’ 였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된 사람의 특징은 ‘회개’입니다. 갈릴리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엎드려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또한 다메섹으로 향하는 청년 사울이 도중에 빛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에 그는 회심하고 평생을 주님께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빛 앞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감춰졌던 것이 드러나듯이, 성령께서 강렬한 빛으로 조명하실 때 우리의 죄는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는 고백과 함께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사인’을 보내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놀람’으로 끝나지만, 진정한 ‘회개’를 통해 돌아올 줄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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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7"살리는 교회" | 2026-05-17 |
| 사도행전 6장은 일곱 집사를 세우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스데반, 빌립과 같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이후에 스데반은 공회에 잡히게 되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비단 스데반뿐만 아니라 빌립도 사마리아 성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더 나아가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앞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그들에게 주었던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제와 같은 봉사는 집사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봉사 사역이 아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더 나아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내시도 복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도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한목자 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담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양하고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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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6"성장을 위한 도전" | 2026-05-10 |
|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린 아이와 같고, 연한 순과 같이 여리고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거룩해야 할 공동체 안에도 죄는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때에’ 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때, 교회에는 많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반면에 그 때, 교회에는 외부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능욕을 당했습니다. 또한 내부로는 갈등이 생기며 분열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이 같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표적’과 ‘핍박’이 있었고, ‘영광’과 ‘능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때에’ 교회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행6: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으로 가득차 있을 때, 부흥과 성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이 있고, 능욕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인생은 ‘희노애락’ 이 담겨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들만 있지 않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장이 있고,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를 ‘유기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프고 잘 회복된 이후에 급성장하듯이 교회도 고통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아픔과 상처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하는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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