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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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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 2026-03-15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이어졌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덴은 헬라 철학과 그리스 신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통해 인간의 쾌락과 이성을 강조했으며, 수많은 신전을 세우고 신들을 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심이 매우 강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 세워진 제단들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제단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참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했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종교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은 인간의 열심에서 시작되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참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아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과 이성이 발달하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가득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557"세 이레의 소망" 2026-03-08
사도행전 17장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두 가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계를 위해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복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세 안식일 동안” 말씀을 강론했다고 기록합니다. 고작 세 이레, 약 3주에 불과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셨고, 이후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 은혜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짧은 시간 속에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 이레’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다니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세 이레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응답이 세 이레가 끝난 뒤가 아니라,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첫날부터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간의 길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는 그 결단의 순간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고,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게 하셨으며,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심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씨를 뿌리는 사람일 뿐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는 고백처럼 모든 성장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겸비하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역사하십니다. 세 이레의 시간처럼 짧아 보이는 순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그 시작입니다. 그 결단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믿음 가운데 새로운 소망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556"함으로" 2026-03-01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빌립보 감옥 사건은 신앙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밤중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기도함으로 그리고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양은 조용한 독백이 아니라, 감옥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뿐 아니라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풀어졌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를 자유케 합니다. 감옥 안에서 드려진 기도와 찬양이, 절망의 공간을 구원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역사합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감옥 간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위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에게 참된 자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자유하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 그는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되었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게 됩니다. 바울의 대답은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함으로’였습니다.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한 걸음 내딛는 신앙이 역사를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함으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도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가정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555인정함이러라 2026-02-22
예루살렘 공회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 됨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마가 요한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심히 다투며 각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분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조차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나바를 통해 마가는 회복되었고, 바울은 디모데라는 평생의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더 굳건해지고, 그 수는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이어지는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세 번의 사인’을 받게 됩니다. 모두 자신의 뜻과는 다른 ‘가지 말라’는 사인이었습니다. 아시아로 가지 말라는 성령의 사인을 받았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지만 예수의 영이 막으셨습니다.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은 단지 ‘가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멈추라’ 하실 때 멈출 수 있는 것도 순종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예비된 영혼을 통해, 빌립보와 유럽 교회의 시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머물면 길을 잃기 쉽지만,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순합니다. 그 분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오늘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의 길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554본질이 이긴다 2026-02-15
사도행전 15장은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했던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바로 이방인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교회 내부 갈등이 아니라, 복음이 어디까지 유효한가라는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복음은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치열한 논의 끝에 분명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주셨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으며, 구원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라는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정 이후에도 논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보듯이, 베드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피했고, 바울은 이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라는 본질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킨 기준은 분명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다른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은 이방인을 위해 쓰임 받았지만, 그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양함은 다툼의 이유가 아니라,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과 명분이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승리해야 합니다. 결국 본질이 이깁니다.
553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2026-02-08
사도행전 14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후반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 이고니온으로, 다시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이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박해’였습니다. 결국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깨어났고, 다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안에는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 성안에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복음의 우물을 팠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우물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계신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각자에게 맡겨진 우물을 파는 삶.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552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2026-02-01
사도행전 13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분명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었지만, 동시에 시기와 반발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는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이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은 믿음이 인간의 선택이나 결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작정되다’는 표현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택을 가리키며, 그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와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믿게 된 이유는 나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장로교 신앙 전통에서 말하는 선택과 작정의 교리는 바로 이 진리를 붙드는 신앙 고백입니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갈리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신앙심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보다, 오히려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 저 사람은 믿지 않았는가”를 묻기보다,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551그들에게서 떠나다 2026-01-25
‘가나안 성도’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안나가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실망도 있고, 상처도 있고, 신앙의 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지 못한다고 느낄 때, 떠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떠난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신앙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했고, 계명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채우려 했지, 내려놓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또 한 명의 떠난 청년이 등장합니다.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동행했지만, 중간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선교의 고됨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바울은 냉철했고, 바나바는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마저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팀으로 나뉜 선교는 오히려 복음을 더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훗날 떠났던 마가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베드로를 따라다니며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마가는 그들에게서 떠났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회복의 뒤에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앞에 서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되기보다 요나단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 끝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50분량대로 2026-01-18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본받고 싶은 믿음의 사람들도 있고,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이 두 부류의 삶을 매우 분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권력과 인기를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 가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름 없이 사명을 감당하다 순교한 사도 야고보가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대를 이어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1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디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체면, 그리고 인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화려한 권세를 길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결국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단 한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그는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였지만,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전할 뿐입니다. 야고보는 늘 베드로와 요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다혈질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량을 알았고, 그 분량대로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의 모습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감옥에 갇힌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고,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신앙 공동체는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교할 이유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깨끗하게 준비되길 바랍니다.
549예배의 기적이, 삶의 기적으로 2026-01-11
물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는 가축 떼를 이끌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매우 덥고 건조한 기후입니다. 그만큼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찾아옵니다. 식솔들과 가축 떼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그랄 땅으로 가게 됐지만 거기에서 이삭은 아내를 빼앗길 뻔한 ‘가정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소중한 우물물을 두고 블레셋 목자들과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유목민으로서 ‘기업의 위기’를 연달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기는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겪었던 어려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이 위기들은 아브라함에게 받은 나쁜 유산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이러한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유산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고 하시며, 흉년 속에서도 이삭에게 백 배의 결실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언약의 근거는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자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부모의 신앙이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유산이 이삭에게 계승된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위기의 순간마다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행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거기서 장막을 쳤고, 동시에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창26:25)
그들은 먼저 예배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가정(장막)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가 우물을 파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예배와 가정과 일터가 ‘하나’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온 땅을 살리며 회복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마찬가지로 2026년 예배의 자리로부터 시작된 기적이, 삶의 기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