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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1"달라지다" | 2026-06-21 |
| 사람들은 누구나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처럼, 보통 사람들도 날마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단순한 자기 계발이나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청년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변화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 사울은 ‘위협’과 ‘살기’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은 찾아오셨고, 만나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수를 만난 후에도 사울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다메섹에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도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지 역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결국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달라진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박해자였던 그는 제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주 안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고, 생활과 형편도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우리는 예수님 닮은 존재로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 했고, 제자들조차 그의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사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바나바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기도했고, 바나바는 그를 위로하고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울을 변화시킨 것은 정죄나 훈계가 아니라, ‘기도’와 ‘위로’였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된 변화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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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0"전적으로" | 2026-06-14 |
|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적으로’ 위협과 살기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조차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정의라고 확신하며 계속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울의 모습은 단순한 폭력적 성향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의 전형입니다. 인간은 단 1%의 선한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이며(롬 3:10-12),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하는 영적 무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주님은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사울은 그동안 자신이 박해했던 대상이 바로 주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그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청각, 시각, 미각, 감각 전체가 마비된 상태, 즉 전적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청년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는 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무능력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오직 주님이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곧 사울이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 우리는 혈기와 교만함으로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의 변화와 회복은 언제나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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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9"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 | 2026-06-07 |
|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다시 가사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가사로 향하는 길은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였습니다. 내시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방문 목적은 ‘(하나님께)예배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를 사모하는 자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빌립이 광야로 가서 내시를 만나게 된 이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행8:26) 빌립은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비된 한 영혼을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사모하는 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53장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본에 따르면 내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내시와는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Already)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Not yet) 달려가야 할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하여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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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8"하나님의 사인, 그리고 놀람과 회개" | 2026-05-31 |
| 초대교회에 많은 성령의 역사와 이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이방의 땅에서도 이러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가운데 부작용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마술사 시몬과(행 8장) 같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부와 인기를 얻고자 했던 것9820입니다. 그는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개’ 였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된 사람의 특징은 ‘회개’입니다. 갈릴리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엎드려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또한 다메섹으로 향하는 청년 사울이 도중에 빛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에 그는 회심하고 평생을 주님께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빛 앞에서 어둠은 사라지고 감춰졌던 것이 드러나듯이, 성령께서 강렬한 빛으로 조명하실 때 우리의 죄는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는 고백과 함께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사인’을 보내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놀람’으로 끝나지만, 진정한 ‘회개’를 통해 돌아올 줄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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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7"살리는 교회" | 2026-05-17 |
| 사도행전 6장은 일곱 집사를 세우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스데반, 빌립과 같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이후에 스데반은 공회에 잡히게 되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비단 스데반뿐만 아니라 빌립도 사마리아 성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더 나아가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앞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그들에게 주었던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제와 같은 봉사는 집사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봉사 사역이 아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더 나아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내시도 복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도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한목자 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담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양하고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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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6"성장을 위한 도전" | 2026-05-10 |
|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린 아이와 같고, 연한 순과 같이 여리고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거룩해야 할 공동체 안에도 죄는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때에’ 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때, 교회에는 많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반면에 그 때, 교회에는 외부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능욕을 당했습니다. 또한 내부로는 갈등이 생기며 분열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이 같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표적’과 ‘핍박’이 있었고, ‘영광’과 ‘능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때에’ 교회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행6: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으로 가득차 있을 때, 부흥과 성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이 있고, 능욕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인생은 ‘희노애락’ 이 담겨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들만 있지 않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장이 있고,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를 ‘유기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프고 잘 회복된 이후에 급성장하듯이 교회도 고통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아픔과 상처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하는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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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5"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훈" | 2026-05-03 |
|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초대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 차 있는 순수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죄악과 탐욕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전해야 할 공동체가 죄로 오염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끝에 얻게 된 공동체입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과 맞바꾼 교회를 지켜야 했습니다. 교회는 아들의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 마땅히 그 유산을 순수하게 지켜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죄악을 거둬내셔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의 ‘정신’(Spirit)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그 정신은 성령(Holy Spirit)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 위협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비록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정신만은 지켜야 합니다. 순수한 교회로, 거룩한 공동체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주인 될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순수함을 간직한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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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4"영화로우심" | 2026-04-26 |
|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포하는 자’ 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거침없이 선포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들은 ‘증인’ 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선포할 때마다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삼천명, 오천명이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든 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4:21). 이는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게 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46편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선포하며 찬양합니다. 주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많은 이들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 가운데 지켜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포하라’ 는 명령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마치 ‘고요 속의 외침’ 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가만히 있으라’, ‘침묵할 것’을 강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도(출14:14),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진격해야 할 때도(수6:10) 가만히 있을 것을, 그리고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역설의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가 역설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광’ 이전에 ‘저주’였고, ‘영생’ 이전에 ‘죽음’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광과 함께 하는 고난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시에 우리가 가야할 길에는 고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No Cross, No Cr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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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3"임재하심" | 2026-04-19 |
|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19:18)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강림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강림 사건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인류의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 곧 메시지가 되어서 십자가 위에서 직접 나타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확증해주는 사건입니다.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그 날’, ‘그 다락방’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강림하시게 될 때,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림’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더 이상 강림에 대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날에 있을 재림주로 오실 예수님의 강림만이 예고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 강림 이후로는 ‘강림’이 아닌, ‘임재’가 있을 뿐입니다. ‘임재’는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강림하신 성령님께서는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도의 심령 안에 내주하시고, 매일의 삶에서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소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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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2"기름부으심" | 2026-04-12 |
| 사도행전은 누가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주목하였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것이 의사였던 누가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가능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령의 행전, 즉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면서, 동시에 부푼 기대감으로 성령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준비해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을 세우는 일’ 이었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직무를 맡을 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직무 맡은 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행1:22). 또한 ‘직무’에 해당되는 원어상의 의미는 ‘섬김, 봉사’입니다. 그래서 ‘직무 맡은 자’는 좁은 의미로 ‘사도’, 넓은 의미에서 ‘직분자’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직무 맡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자로, 다양한 직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섬기는 일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분자의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준비된 증인들에게, 곧 직분 맡은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사도와 증인을 세우신 이후에 오순절 성령께서는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기 위해 각자의 그릇을 준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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