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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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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살리는 교회" 2026-05-17
사도행전 6장은 일곱 집사를 세우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스데반, 빌립과 같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이후에 스데반은 공회에 잡히게 되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비단 스데반뿐만 아니라 빌립도 사마리아 성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더 나아가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앞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그들에게 주었던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제와 같은 봉사는 집사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봉사 사역이 아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더 나아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내시도 복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도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한목자 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담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양하고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566"성장을 위한 도전" 2026-05-10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린 아이와 같고, 연한 순과 같이 여리고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거룩해야 할 공동체 안에도 죄는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때에’ 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때, 교회에는 많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반면에 그 때, 교회에는 외부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능욕을 당했습니다. 또한 내부로는 갈등이 생기며 분열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이 같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표적’과 ‘핍박’이 있었고, ‘영광’과 ‘능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때에’ 교회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행6: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으로 가득차 있을 때, 부흥과 성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이 있고, 능욕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인생은 ‘희노애락’ 이 담겨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들만 있지 않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장이 있고,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를 ‘유기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프고 잘 회복된 이후에 급성장하듯이 교회도 고통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아픔과 상처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하는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565"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훈" 2026-05-03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초대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 차 있는 순수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죄악과 탐욕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전해야 할 공동체가 죄로 오염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끝에 얻게 된 공동체입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과 맞바꾼 교회를 지켜야 했습니다. 교회는 아들의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 마땅히 그 유산을 순수하게 지켜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죄악을 거둬내셔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의 ‘정신’(Spirit)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그 정신은 성령(Holy Spirit)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 위협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비록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정신만은 지켜야 합니다. 순수한 교회로, 거룩한 공동체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주인 될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순수함을 간직한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564"영화로우심" 2026-04-26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포하는 자’ 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거침없이 선포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들은 ‘증인’ 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선포할 때마다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삼천명, 오천명이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든 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4:21). 이는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게 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46편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선포하며 찬양합니다. 주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많은 이들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 가운데 지켜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포하라’ 는 명령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마치 ‘고요 속의 외침’ 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가만히 있으라’, ‘침묵할 것’을 강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도(출14:14),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진격해야 할 때도(수6:10) 가만히 있을 것을, 그리고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역설의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가 역설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광’ 이전에 ‘저주’였고, ‘영생’ 이전에 ‘죽음’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광과 함께 하는 고난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시에 우리가 가야할 길에는 고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No Cross, No Crown)
563"임재하심" 2026-04-19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의 시내산 강림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19:18)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강림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강림 사건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인류의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 곧 메시지가 되어서 십자가 위에서 직접 나타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확증해주는 사건입니다.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그 날’, ‘그 다락방’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강림하시게 될 때,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림’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더 이상 강림에 대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날에 있을 재림주로 오실 예수님의 강림만이 예고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 강림 이후로는 ‘강림’이 아닌, ‘임재’가 있을 뿐입니다. ‘임재’는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강림하신 성령님께서는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도의 심령 안에 내주하시고, 매일의 삶에서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소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562"기름부으심" 2026-04-12
사도행전은 누가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주목하였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것이 의사였던 누가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가능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령의 행전, 즉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면서, 동시에 부푼 기대감으로 성령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준비해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을 세우는 일’ 이었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직무를 맡을 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직무 맡은 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행1:22). 또한 ‘직무’에 해당되는 원어상의 의미는 ‘섬김, 봉사’입니다. 그래서 ‘직무 맡은 자’는 좁은 의미로 ‘사도’, 넓은 의미에서 ‘직분자’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직무 맡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자로, 다양한 직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섬기는 일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분자의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준비된 증인들에게, 곧 직분 맡은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사도와 증인을 세우신 이후에 오순절 성령께서는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기 위해 각자의 그릇을 준비합시다.
561"부활후에" 2026-04-05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과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대전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전제가 거짓이라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증인들의 증언 또한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과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폭력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신념을, 즉 믿음을 지켜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필 십자가에 못 박힌 중죄인을 믿느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이고, 실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1)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뜻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을 삼기 위해’(행1:8) 먼저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주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먼저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서 불어 넣어 주십니다. 오순절 그날처럼 말입니다.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60"머리를 깎았더라" 2026-03-29
사람이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결단과 각오를 담은 상징적인 행동일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혹은 중요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을 다잡기 위해 변화를 선택합니다.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결단과 서원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핍박을 피해 떠나야 했으며, 아덴에서는 기대와 달리 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고린도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마음으로 서원하며 사역에 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받으시고 고린도에서 놀라운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가 세워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마친 후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이 마쳐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명을 향한 출발을 뜻합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에베소를 지나며 사람들의 간청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는 고백을 남기고 길을 떠납니다. 자신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던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순종을 통해 그의 길을 여셨고, 이후 그는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오랜 기간 머물며 말씀을 전하는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원하던 길이 막히고 다른 방향으로 인도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순종을 배우게 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가장 합당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훈련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59"붙잡히다" 2026-03-22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때로는 권력이나 욕심에, 때로는 습관과 중독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문제는 무엇에 붙잡혀 있느냐입니다. 잘못된 것에 붙잡히면 결국 다른 사람까지 얽매이게 하지만, 바른 것에 붙잡히면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바로 그 예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위협과 살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을 얽매던 자가, 사람을 자유케 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바울의 사역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덴에서의 사역은 기대와 달리 큰 열매를 맺지 못했고, 그는 낙심한 채 고린도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 역시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실패자들의 만남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달랐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알지 못해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방향은 ‘무엇에 붙잡혀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붙잡혀야 하나요, 그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558"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 2026-03-15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이어졌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덴은 헬라 철학과 그리스 신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통해 인간의 쾌락과 이성을 강조했으며, 수많은 신전을 세우고 신들을 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심이 매우 강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 세워진 제단들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제단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참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했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종교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은 인간의 열심에서 시작되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참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아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과 이성이 발달하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가득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