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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4본질이 이긴다 | 2026-02-15 |
| 사도행전 15장은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했던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바로 이방인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교회 내부 갈등이 아니라, 복음이 어디까지 유효한가라는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복음은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치열한 논의 끝에 분명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주셨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으며, 구원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라는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정 이후에도 논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보듯이, 베드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피했고, 바울은 이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라는 본질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킨 기준은 분명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다른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은 이방인을 위해 쓰임 받았지만, 그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양함은 다툼의 이유가 아니라,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과 명분이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승리해야 합니다. 결국 본질이 이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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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3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2026-02-08 |
| 사도행전 14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후반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 이고니온으로, 다시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이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박해’였습니다. 결국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깨어났고, 다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안에는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 성안에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복음의 우물을 팠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우물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계신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각자에게 맡겨진 우물을 파는 삶.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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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2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2026-02-01 |
| 사도행전 13장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분명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었지만, 동시에 시기와 반발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는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이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은 믿음이 인간의 선택이나 결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작정되다’는 표현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택을 가리키며, 그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와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믿게 된 이유는 나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장로교 신앙 전통에서 말하는 선택과 작정의 교리는 바로 이 진리를 붙드는 신앙 고백입니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갈리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신앙심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보다, 오히려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 저 사람은 믿지 않았는가”를 묻기보다,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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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1그들에게서 떠나다 | 2026-01-25 |
| ‘가나안 성도’ 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안나가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실망도 있고, 상처도 있고, 신앙의 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지 못한다고 느낄 때, 떠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떠난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신앙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했고, 계명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채우려 했지, 내려놓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또 한 명의 떠난 청년이 등장합니다.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동행했지만, 중간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선교의 고됨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바울은 냉철했고, 바나바는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마저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팀으로 나뉜 선교는 오히려 복음을 더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훗날 떠났던 마가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베드로를 따라다니며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마가는 그들에게서 떠났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회복의 뒤에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앞에 서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되기보다 요나단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 끝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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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0분량대로 | 2026-01-18 |
|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본받고 싶은 믿음의 사람들도 있고,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은 이 두 부류의 삶을 매우 분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권력과 인기를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 가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름 없이 사명을 감당하다 순교한 사도 야고보가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대를 이어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1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디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체면, 그리고 인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화려한 권세를 길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결국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단 한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그는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였지만,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전할 뿐입니다. 야고보는 늘 베드로와 요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다혈질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량을 알았고, 그 분량대로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의 모습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감옥에 갇힌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고,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신앙 공동체는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교할 이유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깨끗하게 준비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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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9예배의 기적이, 삶의 기적으로 | 2026-01-11 |
| 물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는 가축 떼를 이끌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매우 덥고 건조한 기후입니다. 그만큼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찾아옵니다. 식솔들과 가축 떼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그랄 땅으로 가게 됐지만 거기에서 이삭은 아내를 빼앗길 뻔한 ‘가정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소중한 우물물을 두고 블레셋 목자들과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유목민으로서 ‘기업의 위기’를 연달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기는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겪었던 어려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이 위기들은 아브라함에게 받은 나쁜 유산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이러한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유산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고 하시며, 흉년 속에서도 이삭에게 백 배의 결실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언약의 근거는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자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부모의 신앙이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유산이 이삭에게 계승된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위기의 순간마다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행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거기서 장막을 쳤고, 동시에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창26:25) 그들은 먼저 예배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가정(장막)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가 우물을 파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예배와 가정과 일터가 ‘하나’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온 땅을 살리며 회복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마찬가지로 2026년 예배의 자리로부터 시작된 기적이, 삶의 기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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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8처음과 같이 | 2026-01-04 |
|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의 모습 앞에서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곤 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예배, 같은 하루가 계속될 때, 세상은 그것을 정체로 여기며 더 빠른 변화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반복은 ‘멈춤’이 아니라 ‘연단’이며, 그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에 있습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탁월함에 이른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연단은 성취나 결과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해 어떠한 존재로 빚어지고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두십니다. 연단은 우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경험한 사건을 또 한 번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같은 환상과 같은 말씀, 그리고 같은 복음이 되풀이됩니다. 성경이 이를 반복하여 기록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복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아무리 반복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예수님의 이름이 자주 언급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이 생략될 때 찾아옵니다. 예배와 말씀, 그리고 봉사가 습관이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오늘의 본문은 중요한 도전을 전해 줍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행11:15)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과 같이 일하십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도,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은혜도,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도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 은혜는 반복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인생은 반복을 통해 성숙해 갑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신앙의 걸음을 이어 갑니다. 처음과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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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7'편견'과 '복음' | 2025-12-28 |
| 편견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시작되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성찰 없는 판단은 신앙 안에서도 큰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큰 흐름은 복음의 확장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나 자신이 가진 편견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갖는 선민의식, 예루살렘 중심의 신앙이 복음의 발걸음을 제한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그를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발걸음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에게는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세 번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환상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사도였지만,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합니다. 편견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만들고, 신앙을 후퇴시키며,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편견을 깨는 길은 분명합니다. 첫째,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고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겸손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시야를 여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끝으로, 복음입니다.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복음만이 모든 편견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편견을 깨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2026년 새해, 우리도 주님의 발 아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복음 안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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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6달라지다 | 2025-12-21 |
| 사람들은 누구나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처럼, 보통 사람들도 날마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단순한 자기 계발이나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청년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변화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 사울은 ‘위협’과 ‘살기’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은 찾아오셨고, 만나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수를 만난 후에도 사울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다메섹에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도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지 역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결국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달라진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박해자였던 그는 제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주 안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고, 생활과 형편도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우리는 예수님 닮은 존재로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 했고, 제자들조차 그의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사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바나바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기도했고, 바나바는 그를 위로하고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울을 변화시킨 것은 정죄나 훈계가 아니라, ‘기도’와 ‘위로’였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기도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된 변화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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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5전적으로 | 2025-12-14 |
|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적으로’ 위협과 살기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조차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정의라고 확신하며 계속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울의 모습은 단순한 폭력적 성향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의 전형입니다. 인간은 단 1%의 선한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이며(롬 3:10-12),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하는 영적 무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주님은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사울은 그동안 자신이 박해했던 대상이 바로 주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그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청각, 시각, 미각, 감각 전체가 마비된 상태, 즉 전적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청년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는 전적 타락한 인간이, 전적 무능력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오직 주님이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곧 사울이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 우리는 혈기와 교만함으로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의 변화와 회복은 언제나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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