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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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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기름부으심 2025-09-21
사도행전은 누가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주목하였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것이 의사였던 누가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가능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령의 행전, 즉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면서, 동시에 부푼 기대감으로 성령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준비해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을 세우는 일’ 이었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직무를 맡을 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직무 맡은 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행1:22). 또한 ‘직무’에 해당되는 원어상의 의미는 ‘섬김, 봉사’입니다. 그래서 ‘직무 맡은 자’는 좁은 의미로 ‘사도’, 넓은 의미에서 ‘직분자’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직무 맡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자로, 다양한 직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섬기는 일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분자의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준비된 증인들에게, 곧 직분 맡은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사도와 증인을 세우신 이후에 오순절 성령께서는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기 위해 각자의 그릇을 준비합시다.
532다시 예루살렘으로 2025-09-14
예수님은 ‘알파(α)’와 ‘오메가(Ω)’ 이십니다(계22:13). ‘시작과 끝’이 되시기에 누구도 예수님의 처음과 끝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 되십니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시작이 끝이 될 수 있고 마지막이 처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셨던 명령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였습니다. 마지막 명령으로부터 사도행전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끝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반면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로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은 ‘담대하게 거침없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끝이 아니라 여전히 확장되고 있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하셨던 또 다른 명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지금 두 가지 상반되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였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시작이 끝이 되고, 마지막이 처음이 되듯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리고 떠나라는 두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때,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강력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작이 끝이 된 것처럼, 땅끝은 여러분이 밟고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가족이, 그리고 일터가 땅끝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길 바랍니다.
531엎드리자! 갈멜 산에서 2025-09-07
성경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엎드렸던 것을 보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첫발을 딛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누구 앞에 엎드리는가’의 문제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주인이 외출을 다녀오게 되었을 때, 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물을 떠다 엎드려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엎드림’ 의 의미는 ‘내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소유이자,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결국 예수님께 엎드렸다는 사실은 곧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는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 고백입니다.

‘엎드림’의 또 다른 의미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 엎드렸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막5장), 간질병에 걸린 아들의 아버지(마17장), 수로보니게 여인(마15장) 등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 아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면, 한 번 엎드리는 것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 간절함을 담아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엎드리게 되었을 때, 기적은 일어나게 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극심한 가뭄으로 온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엎드렸습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일곱 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게 됩니다(왕상19:44).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엎드렸을 때 비로소 손바닥 만한 구름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작아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성경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합니다.
‘조금 후에 큰 비가 내린지라’. 그래서 우리는 엎드려야 합니다.
530올라가자! 호렙 산으로 2025-08-31
「기도회로 교회를 살려라」는 책에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기도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회 모임 가운데 했던 설교의 결론은 “오늘 밤, 이곳에서부터 참된 영적 부흥이 시작되어, 집집마다 믿음의 불길이 치솟고, 나아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길로 온 교회와 온 세상이 활활 타오르게 합시다”입니다.
과거의 위대한 설교가, 또는 훌륭한 목사님을 보면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단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중에서도 기도의 승리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오늘날 바쁜 시대를 살아가기에 더 많이 기도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가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여건이 되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야 하고, 중심을 드려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멈추고, 먼저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출17장). 그곳에서 백성들은 물을 달라 요구하며 불평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을 쳐서 물을 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당장 목말라했고,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물을 내라고 요구했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지금, 여기’ 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 그 반석’ 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그 반석’을 가리켜 ‘곧 그리스도’ 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실 영원한 생수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따라서 올라갑시다!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그 반석’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갈멜 산상 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온 교회가 하나로 마음을 합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방향’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되길 바랍니다. 그 시작을 위해 같이 건너갑시다!
529건너가자! 얍복 강너머 2025-08-24
때로는 문제 앞에서 회피하거나 돌아가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을 보내게 됩니다. 형 ‘에서’라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오랜 세월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서를 대면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곱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심히 두려워하며 답답함’ 가운데 있었습니다(창32:7). 얍복강을 건너가야 했음에도, 먼저 재물을 건너게 했습니다. 다음 가족을 건너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홀로 얍복 나루에 머물러 있습니다. 에서와 쌓여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당사자는 물질도,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직면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나요? 야곱은 망설였고, 다른 방법으로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주저하는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밤새 씨름하게 됩니다. 문제를 회피하고, 대면하지 못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대면해주신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은 이 씨름에서 이기게 되었고,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장소를 가리켜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 부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를 직면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밤새 씨름하듯 매달려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갈멜 산상 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온 교회가 하나로 마음을 합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방향’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되길 바랍니다. 그 시작을 위해 같이 건너갑시다!
528다시 순종으로 2025-08-17
????(YHWH)-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야훼’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던 구약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신에 ‘아도나이’(주님) 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명령에는 마땅히 복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결산하게 되었을 때, 5달란트, 2달란트 맡긴 종은 두 배로 남기게 되었고, 주인이 이에 대해 칭찬하게 됩니다. 반면 1달란트 맡은 자는 땅에 묻어둔 것을 그대로 돌려드리게 되었는데,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종의 입장에서도 여러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고, ‘다른 종들보다 적은 달란트가 주어졌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잘못하여 맡은 달란트마저 탕진해 버릴 수 있어서 잘 보관하다 돌려드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종의 가장 큰 잘못은 그가 주인을 잘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인에 관해 심각하게 오해하였습니다.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착각하였고,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는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필요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깨닫게 되는 경험을 통해서 얻는 앎입니다. 부부생활을 통해 남녀가 서로에 관해 진정 알게 되듯이,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와 같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 깊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요15:14-15). 주인과 종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친구 사이에는 ‘복종’ 이 아닌 ‘순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527다시 예수로 2025-08-10
일반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주님의 몸 된 교회’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주인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신 첫 번째 비전은 ‘예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이 또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 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많은 신앙인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고난과 역경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드리며, 목숨을 바치기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기록하였던 당시에도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주후 60-70년 당시에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악명높은 로마 황제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돌과 채찍에 맞으며, 심지어 톱이나 칼로 죽임 당하였습니다.(히11:36-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앞에 당한 경주’를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경주는 그저 건강상의 이유로 즐기는 취미생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주’의 원어 상 의미는 ‘싸움’ 또는 ‘전투’입니다. 그것은 영적 싸움이자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치열한 싸움에서 가장 요구되었던 것은 ‘인내’이자, ‘오래 참음’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고통과 수치를, 그리고 죽음까지도 감내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 입니다’.(고전13:4)
따라서 예수 중심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기다려줄 수 있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비의 이야기는 이러한 믿음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였습니다.
믿음은 ‘일부’가 아닌 ‘전부’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란 조건이 아닌,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부르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526다시 왼손잡이로 2025-08-03
사사기 3장에는 사사 에훗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에훗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그가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성경의 소개 방식입니다. 반면에 ‘왼손잡이’라는 점은 다소 특이한 소개법입니다. ‘그가 오른손잡이든, 아니면 왼손잡이든 굳이 밝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그가 왼손잡이였던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베냐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을 직역하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그들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베냐민 사람의 자존심은 ‘오른손’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념 상 오른손(오른편)은 항상 옳고 정의로운 편을 상징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항상 오른편에 계시다 믿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사는 자손들입니다.
그 가운데 왼손잡이 에훗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그를 괴롭히는 약점이었을 것입니다. 오른손의 아들들 속에서 왼손잡이로 살아야 했던 에훗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원어 상에서 왼손잡이의 정확한 의미는 ‘오른손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있는, 장애가 있는’ 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쓰고 싶지만 할 수 없이 왼손잡이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약점투성이의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모압의 탄압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오른손이 되어주십니다. 오른손의 하나님을 의지하길 바랍니다.
525다시 믿음으로 2025-07-27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사실 이 말은 믿음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상 ‘믿음’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믿음에 관해서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서는 믿음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그 존재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믿음에는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믿음은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 즉 ‘상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떠한 상급보다 더 큰 상이 되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상이 되시고, 전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부가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비의 이야기는 이러한 믿음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였습니다.
믿음은 ‘일부’가 아닌 ‘전부’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란 조건이 아닌,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는 부르짖음에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524다시 은혜로 2025-07-20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형성된 문화 양식이나 생활 또는 사고 방식’을 가리켜 ‘전통’ 이라 말합니다. 반면에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이지만 낡아서 고치거나 버려야 할 것’을 가리켜 ‘인습’ 이라 부릅니다.
비단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가운데도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신앙적 ‘전통’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따라 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고수하는 ‘전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막7:24-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목숨처럼 따르는 ‘장로들의 전통’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제자들의 행위는 ‘더럽고’, ‘부정한’ 것입니다. 또한 동일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 또한 ‘더럽고, 부정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와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들과 같은 선택받은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그러한 사람들의 편견 따위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어린 딸이 귀신 들려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에게 있어서 그런 편견이나 전통은 전혀 중요치 않았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 알면서도,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주님도 그런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당연한 은혜란 없습니다. 처음부터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발 아래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