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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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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세계 평화 2020-01-12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샬롬>이라는 말로 인사를 합니다. 샬롬은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언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샬롬(shalom)은 대부분 <평화>라고 번역하는데 간혹 <형통>이라는 말로 번역을 한 곳도 있습니다(시73:3). 구약성경의 샬롬은 동사 샬람(shalam), <평화를 주다>에서 온 말입니다. 샬람은 아카디어 샬라무(shalamu)인데 “건강하다, 완전하다, 평화롭다”는 말로 정치적으로 평안한 상태, 즉 전쟁이 그치고 이웃 국가와 화친의 상태를 <샬라무>라고 표현합니다. 샬람무의 평화는 원시사회에서 이웃과 원한 관계가 없이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샬롬은 전쟁이 없는 평안한 상태를 표현하는 히브리 언어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샬롬(평화, 안식)의 땅을 들어간다고 표현합니다. 레위기 26장 6절에 보면 “내가 그 땅에 평화(샬롬)를 줄 것인즉 -- ” 대적의 칼과 사나운 짐승이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보호하신다고 기록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샬롬을 누리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샬롬의 땅으로 들어가 샬롬을 누리지 못합니다. 구약의 사사시대를 말할 때 우리는 “샬롬(평화, 안식)의 땅에서 엔샬롬(평화 없음)을 경험하는 슬프고 암울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샬롬(평화. 안식)의 땅에서 엔살롬(평화. 안식없음)을 경험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가나안 종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안의 부족들과 전쟁을 하는 400년의 사사시대가 온 것입니다.
평화가 깨진 “엔샬롬의 시대”를 말할 때 멀리 구약의 사사시대로 올라가지 않아도 2020년 1월 미국이 이란의 이인자 솔레이마니를 드론으로 암살시키고 이란이 미군기지 미사일 공격은 평화를 깨트리는 엔샬롬의 행동입니다. 이러한 샬롬이 깨진 엔샬롬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까?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6)
242여호와는 나의 깃발 2020-01-04
깃발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은 그 나라의 국기(國旗)입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깃발은 태극기이며 미국은 성조기, 일본은 일장기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군에서는 지휘관이나 특정 부대를 상징하고 전투 중에 부대의 위치를 알리고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기수를 세워 깃발을 높이 듭니다. 깃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이야기합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할 때 막센티우스군과 밀비우스 다리 전투 중 “이 깃발로 나가 싸우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깃발이 X, P입니다. 헬라어 <크리스토스 'Χριστοs 그리스도)의 첫 글자(키 X)와 둘째 글자(로 P)가 겹쳐진 문향의 깃발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깃발을 내세워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그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바닷가 깃대에 아우성치듯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출애굽 17장에 보면 아말렉과 전쟁을 하는 모세는 전투 현장에 여호수아를 보내고 자신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손을 높이 듭니다. 손을 높이 들 때 손이 올라가면 승리하고 내려오면 패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받쳐줍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모세는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부릅니다. 이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승리라는 뜻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마치 다윗의 골리앗 앞에서 외침 말처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 <여호와 닛시> 그 깃발로 세상에 나가 모든 일에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41희망은 날개가 있다 2019-12-29
에밀리 디킨슨 (Emily E. Dickinson 1830-1886)은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애머스트(Amherst)에서 1830년에 태어나 활동한 천재 여류시인입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애머스트 대학(Amherst College)을 설립했고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국회위원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녀는 청교도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활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평상시 외부출입을 즐기지 않았고 집에서 홀로 시 쓰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으나 죽은 후 동생이 작품을 발견하고 1890년 그녀의 시집을 출판했습니다. 오늘 그의 작품 중에 < 희망은 날개 달린 것 >를 소개합니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모진 바람 속에서 더욱 달콤한 소리
아무리 심한 폭풍도
많은 이의 가슴 따뜻이 보듬는
그 작은 새의 노래 멈추지 못하리.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
허나 아무리 절박한 때에도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다.

시의 제목이 없기에 첫 줄의 문장이 제목이 되었습니다. 제목은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으로 직역하면 희망은 날개가 있다는 말입니다.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우리 마음으로 날아와 가사 없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 희망은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노래합니다. 오늘 2019년 마지막 주간에 혹시라도 희망을 잃었다면 에밀리 디킨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노래를 듣고 2020년에는 다시 한 번 <희망을 노래합시다>.
240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2019-12-22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살던 15살 소녀 로저 파크스는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앨라배마주에서 운행하는 버스는 흑인과 백인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고 흑인이 백인 자리에 앉으면 벌금을 내는 인종차별의 현장이었습니다. 로저 파크스 사건은 버스 안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운동인 버스보이콧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몽고메리시에서 목회를 하던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 1968) 목사는 버스 보이콧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미국 대법원으로부터 <대중교통의 흑백 분리 금지 명령>을 받아냈습니다. 이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인권 운동가 활동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63년의 <워싱턴 평화의 대행진>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 I Have a Dream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 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8년 괴한에게 피살되기 전까지 인종차별에 항거하며 흑인인권운동의 꿈을 실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은 2019년 12월 마지막 주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꿈이 있는가? 생명을 드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꿈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239천국가는 순례자 2019-12-15
영국 베스포드 주 엘스토우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존 번연(John Bunyan, 1628- 1688)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젊은 시절 청교도 혁명에 가담했으며, 청교도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1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은 그가 억울하게 갇혀 있던 감옥에서 집필한 작품입니다.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리스도인(Christian)은 멸망의 도시를 출발하여 천성으로 향하는 순례길을 떠납니다. 주인공은 천성을 향한 순례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다쟁이, 게으름, 고집쟁이, 허영의 도시’ 등 그 이름이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만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천성에 도착합니다. <천로역정>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인생이란, 뒤돌아보며 후회하며 가지 않는 길이 아니라,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라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걸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인생길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한 책입니다. 김석균 목사가 작사, 작곡한 “나는 가리라”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나는 따라 가리라는 신앙의 각오를 표현한 복음송 가사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인생길에 모진 비바람과 험한 파도가 일어나도, 눈보라가 일어나도 결코 다른 길을 가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가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난이 덮쳐도 주어진 믿음의 길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처럼, 스캇 펙이 말하는 <아직도 걸어 가야할 인생길>이 있기에 김석균 목사의 <나는 걸어 갈리라>는 다짐의 복음송처럼 우리는 오늘도 천국 가는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238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2019-12-08
2019년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2019년 1월 1일 0시 우리는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2019년 새해 첫 시간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시편 90편에 모세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중국의 도종명 시인은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하루에 새벽을 두 번 맞이할 수 없고),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때를 맞이하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광음여류(光陰如流-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빠름)하오니 주여 인도 하소서”라는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성년부중래>, <광음여류>, <세월부대인>의 말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앞에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까? 일본의 여류작가 야마시타 히데코는 <버림의 행복론 –단사리(斷捨離)>에서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면 자연스레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말합니다. 단(斷)은 넘쳐나는 물건을 ‘끊는다’, 사(捨)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린다’, 리(離)는 끊고 버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물건의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끊고, 버리고, 이별하다’는 뜻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에 너무 소유욕에 집착하지 말고 단사리(斷捨離)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시편 90편에서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말씀처럼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2019년 뜻을 못 이루었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2020년은 우리 앞에 새로운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새롭게 결단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라틴어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 인생은 언제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를 말을 마음에 깊이 생각해봅시다.
237희 망 2019-11-24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럭 오바마는 2004년 자신의 정치 인생에 아주 중요한 기회가 찾아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통령 후보인 존 케리 후보 지지 연설자도 단상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오바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노예들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나먼 이국땅을 향해 떠나는 이민자들의 희망입니다. 불가능을 향해 도전하는 공장 노동자의 아들의 희망입니다. 빼빼 말랐고 이름도 이상하지만 미국에 자신의 자리도 있다고 믿는 아이의 희망입니다. 희망! 어려움 가운데의 희망! 불확실함 가운데의 희망! 그 담대한 희망! 결국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자 이 국가의 기반입니다.” 이렇게 희망을 연설한 오바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사람으로 알려집니다.
그 후 4년 뒤 버럭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취임 연설에도 “혹한의 겨울철에도 애국자들은 추운 강가의 꺼져가는 모닥불 주변에 모여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수도를 적군에 빼앗긴 채 눈밭이 피로 물든 상황에서, 혁명의 성과마저도 불확실하던 상황 속에서도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외우며 견뎌냈습니다. <미래의 세계를 생각하자. 희망과 미덕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겨울에도 공동의 위험에 놀란 도시와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나섰다>는 구절인데 그게 바로 미국입니다.” 이처럼 오바마 대통령은 희망을 연설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립 50주년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50년째의 희년(禧年-땅과, 노예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 가난한 자에게 빚을 탕감하는 기쁨의 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상대방에게 희망을 선포하여 듣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아지는 말과 (2)늘 부정적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는 말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50주년 희년을 선포하는 희망과 기쁨의 공동체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희년의 기쁨을 마음에 누리며, 이웃에게 희년의 자유와 희망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그러기에 부정적 말보다는 상대방에게 희망과 기쁨을 전달하는 복음의 증인이 됩시다.
236희년의 기쁨 2019-11-17
구약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절기 중에 희년(禧年) 제도가 있습니다. 희년(禧年, 영어: jubilee, 히브리어: ????, yobel 요벨-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다)은 구약 시대에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희년이 되면 농사짓던 땅에 휴식을 주며, 각자가 소유했던 모든 땅을 출애굽 때 제비뽑아 분배받은 기업으로 되돌리는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매매하거나 혹은 소유권을 저당 잡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영구히 소유권 이전을 하는 매매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땅을 매매하거나 저당 잡힐지라도 희년이 되면 조건 없이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5장 10절에 희년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
희년은 땅만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로 삼았던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주인이 노예의 속량(贖良 몸값을 받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일) 즉 몸값을 받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대가없이 노예를 속량해주고 자유를 선포합니다. 주인에게 속박되었던 노예가 자유를 얻는 기쁨의 날입니다. 또한 희년은 가난하여 이웃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줍니다. 탕감해주면서 기뻐하고 탕감을 받으면서 감사하는 것이 희년제도입니다. 유대인 월력으로 7월10일에 제사장들이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며 희년을 선포합니다. 나팔이 울려 퍼지면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1년 동안 희년의 기쁨을 모두가 누립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만 49년을 보내고 50년째가 되었습니다. 50년의 희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에 땅을 돌려주며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복음의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마음의 진 빚이 있으면 용서하며 탕감해주는 희년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희년의 기쁨에 동참합시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사61:1-2)
23550주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2019-11-10
황해도 은율 출신의 순수시인 김종삼(1921-1984) 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깊이 있는 믿음을 가진 신자는 아니지만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시인은 분명합니다. 그의 시상은 항상 현실 문제보다는 영혼의 심미적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부>에서 인생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 된다“고 표현을 합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어부> 김종삼--

어부가 바다에 나아가 고기 잡는 일은 언제나 풍랑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부가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러한 어부의 삶을 김종삼 시인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2019년 11월 첫 주일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표현대로 살아온 것이 기적이며 앞으로 살아갈 것이 기적입니다. 50주년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어제의 일에 감사, 오늘 하나님께 영광, 내일을 위한 희망의 도전! 살아온 기적 갈아갈 기적 우리 교회 참된 교회! >
234구속(救贖)과 구속(拘束) 2019-11-03
우리의 일상생활에 자주 쓰는 말은 아니지만 법률 용어에는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옵니다. 법률 전문가들도 사전을 찾아보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어떤 용어들은 아예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도 있습니다. 법률 용어 중 蒙利(몽리)', '貯置(저치)', '轉囑(전촉)', 장리(掌理)'등 어려운 단어가 법조문에 나옵니다. '몽리'는 '저수지 등 수리시설의 혜택을 입음'이라는 뜻이고, '저치'는 '저축하여 둠', ‘전촉’은 ‘다른 기관이나 사람에게 맡기다’, ‘장리’는 일을 맡아서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법률 용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옵니다. (잠13:24)"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잠11:13)"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여기에서 <초달>은 잘못을 다스리기 위하여 회초리를 때리는 일이고, <한담>은 심심풀이로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어려워서 뜻을 모르는 말이 있는가 하면 뜻을 잘못 이해하고 혼동하여 쓰는 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속(救贖)은 “억압당하고 있는 노예의 몸값을 주인에게 주고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속(拘束)은 법률 용어로 “법원 또는 판사가 피의자나 피고인을 강제로 잡아 가두는 일”을 말할 때 씁니다. 구속(救贖)과 구속(拘束)은 한글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릅니다. 구속(救贖)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말하고 구속(拘束)은 자유로운 사람을 강제로 억압하여 잡아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속은 대부분 구속(救贖)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의 말씀은 구속(救贖) 즉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지불했으니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속(救贖) 즉 속량(贖良)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1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