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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우물 안 개구리 | 2019-01-13 |
| 고사성어중 정중지와(井中之蛙-우물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의 장자(莊子)의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다(井蛙不可以語海). 그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拘於虛也). 여름에만 사는 곤충에게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夏蟲不可以語氷). 그 곤충은 여름이라는 시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篤於時也)” 우리는 좁은 우물 속에 앉아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믿고 있는 개구리처럼 지식이 부족하고 무지한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헤어지면서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고 하니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일에 대하여 계속 물어봅니다. 내일에 대하여 메뚜기가 아무리 쉬운 말로 말해줘도 하루살이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마도 평생을 말해도 내일에 대하여 하루살이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왜야하면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다가 죽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어찌 바다를 말하며, 하루살이에게 어찌 내일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 이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의 한도 내에서 말하며 깨달은 범위 안에서 행동합니다. 결국 인간은 눈에 비치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고집스럽게 자기를 주장하며 무지(無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억새풀의 사투리인 으악새를 새라고 주장하며, 한국인 신생아 엉덩이에 나는 푸른 반점인 몽고반점을 중국집이라고 고집하고, 붕어빵 안에는 붕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편견(偏見)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높고, 깊은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이해하고 긍정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일을 모르는 하루살이처럼 편견에 사로 잡혀 자기주장만 하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전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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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뻔뻔하게 찾아온 2019년 | 2019-01-06 |
| 1년은 365일, 시간으로 환산하면 8,760시간, 525,600분, 31,536,00초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할 때 몇 년이나 내 인생의 시간이 남았을까? 모세는 시90편에서 강건하면 80년이라 했는데 아무리 길어도 100년입니다. 누구나 정해진 인생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누구도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2018년이 지나갔고 2019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이성부 시인 말처럼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그리고 눈부시게 우리를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철부지 어린 아기가 출근하는 아빠의 바지 잡고 보채며 현관문을 막아 보지만 아빠는 매정하게 출근길을 서두르는 것처럼 그렇게 가지 말라 애원했건만 2018년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 손 벌려 오는 길 막았지만 2019년은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기다리지 않았던 2019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우리 마음을 비집고 찾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뻔뻔한 2019년을 어떻게 할까?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손님이라면 8,760시간 그와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해야 한다면 미워하지 말고 마음을 고쳐먹고 아름다운 동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나누어 구분을 합니다. 크로노스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의 개념으로 흘러가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말합니다. 즉 달력에 정해진 시간을 말합니다.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기간을 크로노스라 합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내 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어도 우리 곁에 비집고 찾아와 자리를 잡은 뻔뻔한 2019년의 시간을 우리는 크로노스(Chronos)로 흘려보내지 말고, 내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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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018년을 보내면서 | 2018-12-30 |
|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 -용해원 내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른다 살아 있는 사자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솟구치는 피의 몸부림처럼 젊은 영혼에 갈등이 휘몰아쳐 온다 둘러보아라 둘러보아라 세상이 무엇을 주던가 언제나 그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아우성쳐도 우리가 발버둥쳐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두가 잊고 만다 내 가슴에 뜨겁게 흐르는 피의 열정으로 오늘을 살겠다 한바탕 춤사위로 솟구쳤다 몰아쳐오는 바람처럼 거센 폭풍우처럼 한동안만이라도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 싶다 용혜원 시인은 목사님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작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는 열정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센 파도처럼 열정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오늘은 2018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한해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201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2018년 열정의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이제 단 하루라도 거센 파도처럼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열정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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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예배하는 성탄절 | 2018-12-23 |
| 12월25일은 예수님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은 로마시대에 동지(冬至)를 기준으로 태양신을 섬기던 날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12월25일에 대한 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계속 반대를 하니 결국 431년 에베소회의 때 12월25일을 성탄절로 1월6일을 현현일로 선포합니다. 최초의 기록은 로마의 필로칼루스가 만든 달력 <354년 코데스 달력>에 12월25일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신 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성탄절 날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카톨릭은 12월25일, 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6일, 이집트 콥트교회,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교회는 1월7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성탄절을 지키는 행사 역시 처음에는 그날만 지키던 것을 중세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마음에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절(강림절(Advent-11월 마지막 주일부터)로 발전하게 되었고 기쁨의 성탄축하를 한다는 명분아래 점점 세속의 상업성이 들어와 화려해진 성탄절 행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성탄 전야는 크리스마스 이브닝(Evening/저녁)의 준말로 다른 날보다 더 조용히 거룩하게 가족끼리 성탄을 기다리는 날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이교에서 온 절기이며, 세속적으로 화려해진 성탄절을 지키지 말자하여 1647년 영국 의회에서 성탄절을 완전히 금지시켰던 때도 있었습니다. 초기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역시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초기 선교사들이 성탄절을 지켰습니다. 독립신문 1896년 12월 24일 기사에 “내일은 그리스도 탄생일”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1900년 와서 성탄절에 교회에서 지역 주민들을 초청하여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성탄절 선물을 받으려고 1년에 한차례 교회를 나왔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상인들의 상업적 전술이 교회에 들어와 성탄절 선물과 카드를 서로 주고받는 행사들이 많아지고 성탄 트리와 점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성탄절은 크리스마스로 Christ(크라이스트/그리스도)+mass(미사/예배)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2018년 성탄절은 아기예수로 오신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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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나무를 가꾸는 사람들 | 2018-12-16 |
| 오래 전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란 칼럼에서 장 지오노의 이야기, 천리포 수목원, 남이섬 이야기, 전남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소개했습니다.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입니다.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1913년부터 해발 1,200M -1,300M 프랑스 프로방스 고산지대 황무지에 매일 도토리 100개를 심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홀로 3년 동안 10만개를 심었습니다. 주인공은 52세부터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37년 만인 89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큰 숲이 되었습니다.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 천리포에 우리나라 최초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은 1946년 연합군 중위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 2002 /민병갈(閔丙渴-한국귀화)가 1962년 17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1970년부터 40년 동안 나무와 식물을 가꾸어 13,200여 종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을 이룬 민병갈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 선생 역시 남이섬에 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남이섬을 만들었습니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조성한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56년부터 76년까지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오늘의 편백나무 숲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 한림농원은 1971년 송봉규 선생이 황무지의 모래땅을 매입하여 오늘의 한림농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수목원의 숲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작은 일이었지만 20년,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숲을 이루고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는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복음운동의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는 어느 교회든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큰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 참된 교회도 시작은 작았지만 이제 부흥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이제 부터입니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 결 같이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나무를 가꾸어 갑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교회공동체를 세워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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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일편단심 소명(一片丹心 召命) | 2018-12-09 |
|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개인 재산이 660억 달러(약 74조 원)로 세계에서 제일부자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 또한 성공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가 성공한 사람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그의 생활 법칙을 분석한 중국의 성공분석가들은 <빌 게이츠의 성공인생 11가지 생활법칙>을 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출판사인 나침판출판사에서 이 책을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왜? 빌게이츠의 인생철학을 분석한 책을 출판했을까? 모범적 신앙인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빌 게이츠일까? 아마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빌 게이츠를 소개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빌 게이츠가 돈을 많이 번 부자이기에 우리도 부자인생을 살기 위하여 그의 인생철학을 닮아가자고 이 책을 소개했다면 신앙인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의 삶보다 하나님의 소명(召命)의 삶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쓴 <소명>이란 책을 보면 맨 처음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하는 일마다 행운이 따라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내 평생에 못다 쓸 만큼의 돈을 벌었습니다. ------- 제가 돈을 번 목적은 제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제 대신 다른 사람이 결코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떤 대가든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인생의 목적인지 모르고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한 인생은 어느 날 돈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깨달을 때 오는 허탈감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긴 사명을 일생 이루며 사는 소명자의 삶을 삽니다. 오스 기니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는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부자의 삶보다 소명의 삶을 사는지요? 누구로부터 소명을 받았는지요? 일편단심 소명을 위한 순종을 각오하고 계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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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경건을 위한 기도 | 2018-12-02 |
|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 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교부 신학자입니다.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늘 자신의 경건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오셔서 /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 그리하여 모든 죄악된 생각을 버리고 / 유일한 선의 근원이신 주님만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 오!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 하나님이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하옵시고, / 나는 너의 구원이라고 내 영혼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의 심령을 맡기오니 그 귀를 여셔서 /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시고 / 그 음성만 따라서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본 받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1380-1471)는 경건을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 당신이 보시기에 값진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 당신께 거슬리는 일을 미워하게 하소서. /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하지 마시고, / 무지한 인간의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지 말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참된 판단을 분별 있게 내리도록 하시며,/ 무엇보다도 항상 당신의 뜻에 무엇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가를 묻게 하소서” 예수를 믿고 난 후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늘 유혹이 있습니다. 세속 정신의 허영과 쾌락이 유혹하고, 사탄이 찾아와 달콤한 속삭임으로, 내면의 타락한 죄성(罪性)이 언제나 나를 죄악으로 끌고 갈려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영적 싸움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려는 치열한 영적 투쟁의 현장에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십시오. “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편 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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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2018-11-25 |
| 이어령 교수를 말할 때, 문학 평론가, 언론인, 베스트셀러 작가, 장관, 한국의 지성이라는 별칭을 붙여 부릅니다. 반 기독교인으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딸의 암투병과 실명위기, 손녀의 희귀병 등 연속되는 고난 속에서 예수를 믿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 / 나는 당신의 제단에 /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 사람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별사탕이나 혹은 풍선 같은 것을 만들지만 / 어둠 속에서는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바람개비를 만들 수는 있어도 /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 이 작은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 발톱처럼 무디어진 가슴을 찢어야 하고 코피처럼 진한 후회와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데 / 아! 하나님은 어떻게 그 많은 별들을 축복으로 만드실 수 있었는지요.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지금 / 이렇게 엎드려 기도하는 까닭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 그것을 만들지도. 다 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용서하세요 하나님. -------------- 아 그리고 그 손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 가슴에서도 풍금소리를 울리게 하는 한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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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 윤동주의 <병원> | 2018-11-18 |
| 우리에게 <서시(序詩)>, <별 헤는 밤>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용정에서 윤영석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세운 북간도 용정의 명동(明洞)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하고 일본의 동지사(同志社) 대학(기독교 사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1943년 7월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하려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28살의 1945년 2월 죽음을 맞이합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집을 내려고 자신의 시들을 정리하여 후배 정병욱에게 19편의 원고를 맡깁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상 시집을 출판하지 못합니다. 1941년 후배 정병욱에게 원고를 맡길 때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병원>은 윤동주가 살고 있던 시대를 치료 하고픈 마음의 표현입니다. 당시 시집을 출판하지 못한 이유는 재정적 이유도 있지만 작품 중 <십자가> <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같은 시가 일제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고 또한 일제에 저항하는 윤동주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될 것 같아 때를 기다리다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쓴<병원>의 내용입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세상에는 아픈 환자들이 많습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통하여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윤동주의 마음처럼 우리 모두 절망의 질병으로부터 회복되어 희망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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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열심히 사는 사람들 | 2018-11-11 |
| 옛날 어느 조그만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너무나 작아 주위에 있는 나라로 부터 종종 침략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해 왔습니다. 왕은 전쟁을 앞에 두고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편안하게 대처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며 왕은 전국을 샅샅이 뒤져 제일 유명한 예언자를 찾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며칠 만에 신하들이 한 예언자를 찾아 왕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왕은 예언자에게 전쟁의 승패에 대하여 말하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왕에게 미래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왕이시여! 만약 내가 전쟁에서 이긴다고 하면 당신은 방심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 전쟁에서 진다고 하면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결국 싸우지도 않고 전쟁에서 질 것입니다. 왕이시여! 내가 알려드릴 수 있는 미래는 앞으로 분명 전쟁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의연하고 성실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당신이 알고 싶은 미래는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왕은 전쟁에서 열심히 싸워 나라를 지켰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렘1:5),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언자는 구약성경에서 "나비"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말하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는 사람의 앞날의 길,흉을 말해주고 복채를 받는 세속의 점쟁이들과는 구별이 됩니다. 예언자들은 죄를 짓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여 회개를 촉구하며, 죄의 결과 미래사회는 멸망하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외쳤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왕이 예언자를 찾아와 앞날을 말해 달라는 것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앞날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앞날을 미리 안다면 운명론에 빠져 자신의 삶에 열심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날에 대하여 미리 알려고 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우리며 매일의 삶을 열심히 살 뿐입니다. 또한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알려는 것보다 현실의 삶에 열심을 다 할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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