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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종교개혁(the Reformation) | 2019-10-27 |
| 오늘은 제502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몇 년 전 종교개혁에 대한 칼럼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의 항의문을 발표한 시점을 종교개혁의 출발로 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에서 워낙 큰 사건이기에 때문에 정관사(the)를 붙인 대문자(Reformation)로 표기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표현할 때 “종교개혁” Reformation는 항상 대문자로 씁니다. 그만큼 큰 사건이기 때문에 고유명사이며 대문자로 쓰는 것입니다. 최근에 다른 종교에서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기독교만의 전용 용어가 아니라 불교도, 이슬람도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하여 기독교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 과 구분하기 위하여 소문자로 종교개혁(reformation)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니라는 비판이 일어나자 중립적 용어로 <교회개혁 church reformation>이라고도 쓰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 Reformation는 다시(Re)+ 형태(form)의 뜻으로 본래의 형태를 부수고 바르게 형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의 <개혁>(改革)이라는 말은 “기구나 제도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침”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고친다는 “개”(改)와 가죽이라는 “혁”(革)이라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가죽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하는 작업은 가죽을 만드는 과정처럼 어려운 과정입니다. 어떤 제도나 기구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것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크게 반발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죽을 만들려면 동물을 잡아 얻은 생가죽에 기름을 빼는 무두질이 필요합니다. 생가죽을 물과 화공약품에 담그고 때리는 무두질이 없으면 가죽은 뻣뻣하여 쓸 수 없게 됩니다. 무두질은 끈질긴 작업이며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이처럼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가죽에 무두질을 하듯 종교개혁은 생명을 건 투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은 가죽을 만드는 작업처럼 어려운 작업이기에 순교를 각오한 끈질긴 작업입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을 1517년의 단회적 사건으로 보지 말고 날마다 계속되는 개혁의 작업으로 우리 마음을 가죽 만드는 어려운 작업처럼 날마다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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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작은 시작, 큰 기적 | 2019-10-20 |
| 몇 차례 소개했던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실재의 인물입니다. 그는 1913년부터 해발 1,200M-1,300M 프랑스 프로방스 고산지대 황무지에 매일 도토리 100개를 심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홀로 3년 동안 10만개를 심었습니다. 주인공은 52세부터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37년 만인 89세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의 큰 숲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황무지에 나무를 싶어 숲을 회복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인도의 마주리 섬이 홍수와 가뭄으로 완전히 황폐해졌을 때 파옝이라는 젊은이가 40년간 홀로 나무를 심어 160만 평을 완전한 숲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 있는 천리포 수목원은 1946년 연합군 중위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된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2002 /민병갈(閔丙渴-한국 귀화)가 1962년 17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1970년부터 40년 동안 나무와 식물을 가꾸어 13,200여 종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천리포 수목원을 이룬 민병갈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 선생 역시 남이섬에 나무를 심어 오늘의 아름다운 남이섬을 만들었습니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조성한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56년부터 76년까지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오늘의 편백나무 숲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 한림농원은 1971년 송봉규 선생이 황무지의 모래땅을 매입하여 오늘의 한림농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복음 운동의 시작은 언제나 작게 출발하지만 나중은 창대케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회복을 위하여 일천일 부흥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작은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나무를 심고 기다리면 황무지가 숲으로 변하듯 영적 부흥을 갈망하며 작은 기도부터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큰 영적 부흥을 주실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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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무제(無題) | 2019-10-13 |
| 우리나라의 고전 ‘흥부전’에 형 놀부와 동생 흥부가 나옵니다. 동생 흥부는 마음씨가 착하고 선한데 놀부는 그 행동이 악하고 해괴합니다. < 초상난 데 춤추기, 불난데 부채질하기, 우는 아기 똥 먹이기, 아이 밴 여자 배 차기, 우물곁에 똥 누어 놓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비오는 날에 장독 열기 > 이러한 것이 놀부의 심술입니다. 언젠가 대학교수들이 놀부의 심술에 대하여 전공별로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육학 전공교수는 놀부의 심술은 천재적이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천재적 행동이 놀부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놀부의 돌출행동을 창조적 가능성으로 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신 교수는 놀부의 성장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하는데 놀부는 분명 애정 결핍의 어린 시절을 보냈든지 아니면 어떤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한 성장 과정이나 충격적 사건이 놀부의 심리적 내면을 지배하기에 그의 외적 행동이 과격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놀부의 행동을 창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심리치료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개성 있는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서로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화문 집회, 서초동 집회로 나누어져 서로를 반목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한 사람을 놓고 보수에서는 뻔뻔한 진보라고, 진보에서는 적폐의 대상인 무식한 꼰데 보수라고 하면서 서로에게 적대적 행동을 합니다. 누가 보아도 분명 국론 분열입니다. 이렇게 분열된 마음이 계속 진행된다면 마지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싸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작은 의사 결정이 미운 감정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에는 살인과 전쟁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야합니다. 국가도, 교회도, 직장도, 가정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이 정답입니다.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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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나는 누구인가? | 2019-10-06 |
|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 목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는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1945년)목사 는 독일 루터교회 소속이며 반 나치운동을 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모임에 가담하였다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945년 처형됩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처형되기 전 1945년에 쓴 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숨길수 없는 존재임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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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토마스 아 켐피스의 <침묵> | 2019-09-29 |
|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1379~1471)는 1379년 독일의 쾰른 부근 켐펜에서 가난한 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토마스 하메르켄(Thomas Hemerken)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보내던 중 19세에 성직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여 <공동생활 형제단>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경건을 위하여 고전 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92살까지 살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고독 속에 홀로 앉아 침묵으로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알려지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라틴어로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라는 작품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묵상되는 책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강조한 책입니다. 이 책은 1부. 영적 생활의 유익한 훈계, 2부. 물질보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라는 훈계, 3부. 그리스도 중심생활에서 오는 영적 위로, 4부. 성만찬을 통한 신앙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세기에 라틴어로 쓰여 진 책이 지금까지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상과 <침묵>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경건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세미하기 때문에 <조용한 침묵> 없이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조용한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오직 주님만 위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시기에 값진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당신께 거슬리는 일을 미워하게 하소서” 우리는 너무나 분주하게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 번쯤 분주한 세상일을 멈추고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 조용한 침묵으로 두 손 모아 주님께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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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희망 | 2019-09-22 |
| <가을의 기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승현 교수는 아버지가 평양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린 시절 믿음 안에서 자랐으며 늘 기도해 주시던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현승 교수의 쓴 <희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는 <희망>을 '황금'으로, '별'로, '수평선의 기적'으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희망>이 있으면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고,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김현승 교수의 <희망>을 소개합니다. 희망, 어두운 땅 속에 묻히면 황금이 되어 불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너의 희망 아득한 바다에 뜨면 수평선의 기적이 되어 먼 나라를 저어 가고, 너의 희망 나에게 가까이 오면 나의 사랑으로 맞아 뜨거운 입술이 된다.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은,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은 우리의 희망!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 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 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 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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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7그래도 희망을 노래하며 삽시다 | 2019-09-15 |
| 우리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하여 외면한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몰트만은 1926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그는 18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포도들 중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견디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중간에 절망한 사람들은 결국 수용소에서 죽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고난을 참고 인내하여 견뎌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몰트만은 신학공부를 하고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신학자가 됩니다. 영국의 윈스톤 처어칠(Winston Churclill 1874-1965)은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영국의 정치인입니다. 그는 중학교 때 세 번이나 진급을 하지 못한 낙제생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1940년에 영국의 보수당 당수가 되었고 영국의 수상이 되어 루즈벨트(Roosevelt) 스탈린(Stalin)등과 함께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했고, 1953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연설 중 옥스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포기하지 말라”(Don't give up !)는 연설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낙제했을 때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생의 여정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볼 때 우리를 낙심하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이 실현되는 사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미래사회는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희망이 없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면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희망을 노래하며 새롭게 도전합시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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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바르게 삽시다 | 2019-09-08 |
|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제19대 문제인 대통령이 취임식 때한 말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를 지명한 후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대학입시 때 반영되는 사회봉사 점수를 특권층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재직하는 대학에 봉사하고 총장상을 받고, 대학교수들도 쓰기 어려운 논문의 제1저자가 되고, 방학 때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통하여 해외 봉사를 하며, 일반인은 방문조차 어려운 키스트(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봉사했다하고 그 활동 스팩으로 자기소개서를 써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사회를 어떻게 기회가 균등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 입학할 실력이 안 되면 재수하고 3수라도 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공정한 것이며 정의로운 것입니다.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한 언론 보도 내용을 보면서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자녀가 장학금 받은 것도 대학입시에 중요한 인턴십 한 것도 아버지인 후보자는 전혀 모르고 딸과 아내가 한 것이라고 답변하는 모습이 화를 넘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한편으로 참된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1달에 한 번씩 토요일에 ‘벧엘의 집’ 봉사를 다녀오기 때문입니다. 유명대학의 인턴, 코이카를 통한 국제 봉사는 못하지만 우리는 매월 작은 봉사를 다녀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사는 사회,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꿈꿉니다. 바르게 삽시다. 그리고 멋지게 공정한 경쟁을 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삽시다. 끝으로 윤동주 선생의 <서시>를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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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5그리스도인의 열정의 삶 | 2019-09-01 |
| 분당에 있는 새에덴 교회는 성도수가 2만 명이나 되는 초대형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는 맨손, 맨몸, 맨땅의 3M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쓴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는 책 2장에 “개고기와 소주 사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척 초기 남전도회가 야유회를 가서 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남전도회 회원들이 개고기를 먹으면서 사이다 병에 몰래 소주를 담아 와서 사이다인 척하면서 목사님 앞에서 소주를 먹었습니다. 이때 어느 집사의 실수로 목사님께 사이다를 따라 준다는 것이 소주를 따라주게 된 것입니다. 사이다인줄 알고 마시던 목사님이 소주를 마시게 되자 갑자기 밥상을 발로 차면서 ‘어떤 XX 같은 놈’이 목사에게 소주를 먹이냐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너희들 이 자리에서 집사 다 잘라버린다’고 소리치고는 야유회 중간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 집사가 술에 취하여 교회로 찾아와 ‘술 한 잔 먹었다고 집사를 자르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참다못한 목사님은 그를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죽기 직전(?)까지 때렸습니다. 분이 나서 ‘너 같은 놈이 집사이기에 한국교회가 요 모양이지’하면서 ‘그래 내가 나 복 받으려고 너희에게 술 먹지 말라고 했느냐? 네 놈들 복 받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런데 목사에게 죽도록 맞은 집사가 목사의 폭력을 문제 삼을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난 후 오히려 집사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목사님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목회에 대한 열정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누구나 인생길은 한 번 주어진 여정입니다. 어떻게 살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9월, 가을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후회 없는 불꽃같은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용혜원 시인의 <거센 파도로 살고 싶다> 중에서--------- 내 가슴에 뜨겁게 흐르는 피의 열정으로 오늘을 살겠다. 한바탕 춤사위로 솟구쳤다 몰아쳐오는 바람처럼 거센 폭풍우처럼, 한동안만이라도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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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4당당하게 삽시다 | 2019-08-25 |
| 우리는 삶을 살 때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남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사는 사회이기에 내 행동에 대하여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도 문제, 남의 시선을 전혀 무시해도 문제가 됩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정도를 <자기의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즉 남들의 시선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출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반드시 여러 번 내 옷차림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라는 질문에 < 5. 대단히 맞다. 4. 약간 맞다. 3. 그저 그렇다. 2. 약간 맞지 않는다. 1. 전혀 맞지 않는다. >라고 대답할 때 점수가 높으면 자기의식이 약하고 점수가 낮으면 자기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너무 약하여 외출할 때 늘 자기 옷차림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하여 출발 시간이 늦어지고 또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의 괜한 시선에 마음이 불안해진다면 자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솝우화 중 <팔러가는 당나귀>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시장에 팔러 갈 때 처음 집에서 나설 때는 당나귀를 그냥 끌고 출발합니다. 이때 사람들이 “당나귀를 타고 가지 왜 그냥 끌고 가는가?”라고 말하니 아버지가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습니다. 조금 가다 사람들이 말하길 아들이 버릇없이 자기는 타고 아버지를 걷게 한다고 수근 거립니다. 이에 아들은 걷고 아버지는 당나귀에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말하길 어찌 어린 아들은 걸어가고 아버지는 타고 가는가? 아들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아들은 당나귀를 메고 갑니다. 그러다 개울을 건너는 중 당나귀가 버둥거려 개울에 빠트렸습니다. <팔러가는 당나귀> 이야기는 자기의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의식이 낮으면 남의 말만 듣다가 개울에 당나귀를 빠트리는 꼴이 됩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 때 당당한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수군거리며 떠드는 사람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 아닙니다. 조금은 개성 있는 삶이 멋진 인생입니다. 오늘도 당당하게 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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