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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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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014년 4월 희망의 복음축제 2014-03-09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라는 제목으로 목회 칼럼을 오래전에 썼습니다. 이 책은 남양만에서 두레 공동체를 이끄시는 김진홍 목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목사님은 대구 계명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본교에서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중 학생으로부터 " 교수님, 우리가 일생 생명을 바쳐 따를 진리란 무엇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질문에 충격을 받아 대학 강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진리를 찾아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로부터 성경 에베소서 1장 7절의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을 소개받아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오랜 세월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시간을 끝내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쳐 목회자가 됩니다. 목사가 된 후 청계천 빈민들의 넝마주이들과 함께 활빈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 하시다가 남양만에서 두레 공동체를 이루었고 구리에서 두레교회를 시무하시다 지금은 동두천두레교회를 시무하십니다. 


목사님이 활동하시는 정치적 상황을 다 긍정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이 쓰신 책 중 <새벽을 깨우리로다>, <정금 같이 나오리라>, <비전 있는 교회>, <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 >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 새벽을 깨우리로라 >는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본다>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항상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목사님 자신이 어려움을 극복한 비전의 사람이기에 이 책의 내용은 더욱 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4월 한 달 우리교회에서는 <2014년 희망의 복음축제>를 계획하고 강사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새로운 결단의 시간을 가지려합니다. 4월11일(금) 오후 8:00시에 김진홍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외 강사님들을 초청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소망의 메시지를 들으려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회복의 기회로 삼고 또한 주변에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423.1운동과 기독교 2014-03-02

1919년 3월 1일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민족이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날입니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독립 국가임을 세계에 선언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는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대부분 목사님들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1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서울에서만 만세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어 거국적 만세운동이 되었습니다. 피해 규모는 조선총독부의 공식집계가 시위참가자 1919년 1년간 202만 명, 시위 횟수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47개가 불에 탔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습니다. 


50명 이상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이 전국에서 311개 지역인데 그중 기독교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이 78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한 지역이 42개 지역이었습니다. 6월30일까지 투옥된 사람이 9,458명중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인구 비례로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국 인구가 1600만이었는데 기독교 인구는 20만 명으로 전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세 운동지역의 38%가 기독교인이 주도했습니다. 또한 투옥된 사람의 22%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이 1.3%밖에 되지 않았지만 3.1운동의 주체적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3.1운동의 시위가 한창일 때 전국교회에 통고문을 보내면서, (1)매일 3번 기도하고, (2)주일은 나라를 위한 금식, (3) 1주일간 주제를 정하여 성경읽기를 했습니다. 월요일-이사야10장(앗시리아에 대한 심판), 화요일-렘12장(유다 멸망의 원인), 수요일-신28장(이스라엘 백성의 축복), 목요일-약5장(고난중 인내),금요일-사59장(회개와 구원),토요일-롬8장(고난후 장차 영광)을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고 핍박 중에도 만세운동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3.1만세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선조들의 믿음을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41제중원(濟衆院) 2014-02-23

광혜원(廣惠院)은 1885년 4월 10일 서울의 재동(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입니다. 당시 궁중 시의관으로 있던 알렌 선교사의 건의에 의하여 고종황제가 설립을 허락하여 세워졌습니다. 광혜(廣惠)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광혜원을 개원한지 16일 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통리교섭통상아문은 제중원을 외교부 관할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중원을 담당했던 알렌과 헤론, 에비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운영상 어려움이 발생하여 1904년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L.H. Severance)의 도움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병원건물을 세워 오늘날의 세브란스 병원이 됩니다. 6.25전쟁 후 어려운 과정을 거쳐 1957년 연희대학과 합병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제중원의 제중(濟衆)이라는 말은 논어의 옹야(雍也)에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민중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라고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널리 백성에게 베풀며 구제 한다”는 뜻합니다. 제중원은 개원한 첫해 환자의 수가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중원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자들 치료했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주 출신 김재원은 1903년쯤 폐질환으로 찾아와 오른쪽 늑골 전부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고 치료하는 중 예수를 믿게 되어 고향 제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오늘의 금성교회가 된 것입니다. 1907년 이기풍목사가 제주에 파송되기 전 제주에는 이미 김재원에 의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또한 제중원에서 배운 백정출신의 박서양은 신분의 벽을 넘어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가 됩니다.     


이처럼 제중원은 병들어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쁨을 주었고, 백정 출신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희망의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제중원의 뜻을 기리어 < 병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치며 구제>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박시제중(博施濟衆)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해야합니다. 

40불평없는 세상만들기 2014-02-16

미국의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목회를 하던 윌 보웬 목사님이 2006년부터 <여름독서클럽>을 진행하던 중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의 뿌리에는 불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윌 보웬 목사님은 바로 <불평 없는 세상 만들기>이라는 캠페인을 통해 세상에 만연해 있는 불평을 근절하자는 의식 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사람의 생각이 부정적일 때 그 생각이 불평으로 표현됨을 알고 불평하는 삶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사보다는 불평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은 안타까워 불평을 그치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고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행복한 인생의 삶을 살려면 불평을 그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200여 명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 [불평없는 세상만들기 (Complaint Free World)]캠페인은 입소문을 타고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전 세계 80여 국가의 1,000만 명 이상이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 불평없는 세상만들기 한국본부가 (CFW KOREA)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보라색 팔찌를 만들어 지급하고 착용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른 쪽에 착용한 손목 보라색 팔찌를 불평을 할 때 마다 왼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불평을 하면 오른 쪽으로 옮겨 착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면서 자신의 불평의 회수를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21일까지 한쪽에 손목에 보라색 팔찌가 머물러 있으면 21일간 불평을 하지 않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간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의 상황에 불평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으며 행복을 느끼고 사는 자들입니다. 고전10:10 <표준새번역> 여러분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불평한 것 같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빌2:14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39노블레스 오블리제 2014-02-09

노블레스 오블리제 는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를 축척한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명성을 지닌 귀족들은 가진 것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지도층들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과거 로마제국의 귀족들에게는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던 말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초기 로마 귀족들은 솔선하여 명장 한니발이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에 참여하였고,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13명의 집정관(Consul)이 전사하였습니다. 집정관은 로마의 관리 중에 최고위 관직으로 오늘날의 장관과 비슷한 직위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개보수한 귀족에 대해서 귀족의 이름을 붙여서 도로이름과 건물을 명명했는데 당시 귀족들은 이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은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세운 카네기멜론 대학교, 은행가 존스 홉킨스가 세운 존스 홉킨스 대학과 병원으로 설립자의 이름을 붙일 뿐 아니라 사회의 큰 공헌을 하는 공공기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많이 퇴색된 듯합니다. 사회의 지도층들의 자녀들이 병역기피와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이 종종 사회의 문제로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실현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귀족계급이 사회를 책임져야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은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하나님나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다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귀족계급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책임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귀족인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8넓은 세상을 바라보라 2014-02-02

미국의 루이지애나에 살고 있는 토미 테니(Tommy Tenny)라는 목사님 쓰신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윗의 장막>과 더불어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은혜를 끼친 책입니다. 


이 책의 첫 부분에 보면 사람이 꽉 들어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아이가 답답해하면서 “아빠 안아줘요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요 ”라고 외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만원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른들의 신발뿐이기에 답답해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입니다. 이때 아이를 안아서 높이 올려주면 그때서야 옆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아이는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는 사물의 관점은 마치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른들의 신발만 보는 어린아이처럼 제한적이며 답답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옛 말에 우물 안 개구리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밖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넓은 세상과 아름다움 세상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본대로 행동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의 사물을 볼 때 우리의 관점으로 고집스럽게 속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관점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위에 계시기에 세상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시야를 낮은 시각으로 한정해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더 높은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2014년 새해가 1월이 지나 이제 2월이 되었습니다. 2014년은 세상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지 말고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보다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욥35:5  

37클뤼니 수도원 (L'Abbaye de Cluny) 2014-01-26

클뤼니 수도원은 프랑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300Km 떨어진 부르고뉴 주(州) 손에루아르 현(縣)에 있는 역사적인 수도원입니다. 910년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Guilaume de Aquitaine )이 자신의 별장을 교회에 기증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 건물의 크기만 하더라도 축구장 2개를 연결한 것만큼 큰 수도원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설립 초기부터 영성에 관심을 두고 교회개혁을 단행한 수도원입니다.


당시 수도원들은 교회의 본질인 영성보다는 세속의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제후들과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을 이용했고, 성직자는 그들의 권력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농지를 받았고,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세금면제, 교회의 치외법권 허용, 재판권부여, 화폐 제조권, 관세 권리 등 교회는 세속의 경제적 특권을 누렸고 수도원장은 지역 제후처럼 행사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이러한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 신앙의 본질인 영성을 회복하려고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설립 때부터 클뤼니 수도원은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경비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헌금으로 하며, 수도원장의 선출은 직선제로 하고, 생활은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명문화 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10-11세기 교회개혁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오딜로 원장 시절(994~1048년)에는 클뤼니 수도원에 속한 수도원이 유럽에 2000개가 넘을 정도로 발전했고 영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하지만 클뤼니 수도원도 세월이 지나면서 설립 당시 영성을 잃게 되니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프랑스 국립 종마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수도원 개혁의 대명사였던 클뤼니 수도원도 영성을 잃게 되니 앙상한 건물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화려한 건물과 성도의 숫자를 자랑한다면 신앙의 본질인 영성을 잃어버린 클뤼니 수도원처럼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교회의 생명인 영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36무제(無題) 2014-01-19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81년 톰 슐만의 소설을 각색하여 1989년에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1959년을 배경으로 보수적인 남자사립학교인 웰튼 아카데미(Welton Academy)에 문학선생으로 새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키팅이라는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키팅 선생님은 너무나 틀에 박힌 사물을 보는 시각과 고정된 가치관에 삶을 강요받는 아이들에게 너의 인생은 매우 중요하며 지금의 삶에 열정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문학 시간에 교과서를 찢어내 버리라고 하는가하면 또한 학생들에게 교실의 책상에 올라가서 사물을 보라고 합니다. 책상 위의 학생들에게 “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책상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


오늘은 칼럼을 쓰면서 목사로써 조금은 소리를 높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비하하며 내가 옳다고 하는 어리석은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털처럼 가벼운 지식을 가지고, 빈 깡통의 소리를 내고도 그것이 옳은 것인 양 큰소리치며 사는 어리석음,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원리라고 떠들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모르는 소름끼치는 무식함을 드러내는 아픈 현실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책상위로 올라가기만 해도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상식이 전부인양 사람을 정죄하며 내 원리가 옳다고 떠들어 대며 나는 네가 하는 일에는 협조할 수 없다고 하는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수준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떠들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 같은 수다이며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좀 더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서로를 이해합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3-4)

35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꼬(Nabucco) 2013-12-07

이탈리아 사람 베르디(GiuseppeVerdi 1813~1901)가 작곡한  오페라 <나부코 Nabucco>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줄여서 부른 것입니다. 오페라 <나부꼬>는 구약 성경 열왕기하 25장에 나오는 유대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내용은 패전국 유다왕의 조카 이스마엘과 침략자 나부꼬 왕의 딸 페나나 공주와의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앞에 방해꾼인 아비가일 때문에 시련이 닥치지만 아버지 나부꼬 왕이 극적으로 나타나 페나나 공주를 구원해 주며, 악역을 맡은 아비가일이 마지막 죽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작품입니다.
베르디가 처음 이 작품의 작곡을 부탁 받았을 때 그는 작품을 작곡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습니다. 당시 베르디는 아내가 죽어 실의에 차 있었고 하는 작품마다 실패하여 몹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카라 극장 지배인 바돌로메 메렐리의 끈질긴 설득 때문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베르디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다 사람들의 상황이 자신의 상황과 비슷함을 느끼고 그는 용기를 내어 나부꼬 작곡하게 됩니다. 결국 1841년 전곡을 작곡했고 1842년 3월 처음 공연을 하게 됩니다. 시연 후 관객들은 열광했고 67회나 연속으로 공연을 하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나부꼬>는 지금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입니다. 1986년 리카르토 무티의 라스칼라 음악감독 취임 공연에서는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이 끝나자 관객들이 30분 동안 박수를 치며 앵콜을 연호하므로 극중 상황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앵콜 곡을 공연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 작곡을 시작할 때 베르디는 연이은 작품 실패와 아내의 죽음으로 절망의 상황이었지만 그는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여 위대한 <나부꼬>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특히 바벨론 강가의 희망의 찬가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은 당시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기에 독립을 염원하는 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국민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여정 길에 한 두 번은 어려운 상황이 옵니다. 그러나 베르디처럼, 바벨론 강가의 포로들처럼 고난의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할 때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34소래교회의 해서제일학교 2013-11-30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1883년5월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소래교회의 시작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하여 시작된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교회가 부흥되어 1895년 7월3일 교회당을 증축하고 헌당식을 거행할 때에는 마을의 85가구 중 80세대가 예수를 믿을 정도로 크게 부흥한 교회입니다. 또한 소래교회는 복음전도 뿐 아니라 교육에도 크게 기여한 교회입니다. 
  소래교회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을 처음에는 야학으로 시작했지만 1895년에는 정부의 허락을 받아 <해서제일학교>로 발전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재정이 어려웠으나 카나다 선교사 윌리암 존 맥켄지 선교사가 소래교회에서 순교한 후 그의 유산을 학교에 기부하므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소래교회가 운영한 해서제일학교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기초하여 학생들을 교육했습니다.
  <해서제일학교> 출신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브란스 의대 제1회 출신으로 최초의 의사이며 독립 운동가인 김필순 선생, 서상륜의 사위로 세브란스 제1회 출신 의사이며 독립운동을 한 홍종은 선생, 서경조의 장남으로 세브란스 제2회 출신 서광호, 중국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과 경신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서병호 선생, 의사이며 독립운동을 한 박헌식 선생, 평생을 세브란스에서 의대생들을 가르쳤으며 연세대학교부총장 원자력병원장과 유한공전재단이사장을 역임한 의학박사 김명선 선생, 그 밖에도 의사인 조광현, 최창수, 박상근, 박승원, 홍순각, 고명우 선생이 있으며 군인으로 활동한 김경선 장군, 여성으로 동경유학생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귀국 후 독립운동을 한 김마리아 선생, 미국 콜롬비아대학 졸업후 수피아 여고와 서울 정신여고 교장을 지낸 김필례 선생, 남궁혁 박사의 부인으로 여성독립운동가인 김함라 선생, 김규식 선생의 부인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순애 선생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소래교회는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해서제일학교>을 세워 한국의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 냈습니다. 특히 의사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여성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복음전도와 인재양성에 힘쓴 선조들의 신앙을 새기며 우리도 전도와 자녀양육에 열심을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