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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노년을 사명으로 삽시다 | 2015-03-14 |
| 지미 카터는 미국 대통령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조지아 주 땅콩 농장주 출신으로 1977년에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1년까지 대통령 직을 수행했습니다. 대통령 시절 <도덕 정치>를 부르짖음으로 크리스챤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했습니다. 재임 시절 캠프데이비드에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초청하여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중동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베긴 수상과 사다트 대통령이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배후에서 중재역할을 한 지미 카터는 24년이 지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임시절보다 퇴임 후의 활동이 더 활발했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분쟁이 있는 곳이면 지구촌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가서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북한의 핵시설문제를 위하여 북한을 방문했고 보스니아 분쟁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99년엔 우간다와 수단의 평화협정을 중재했고 모잠비크와 동티모르 등지에선 선거감시단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Habitat)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방문하여 사랑의 집짓기를 하면서 목수로 땀을 흘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아무리 바쁘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더라도 주일이면 고향 조지아주 침례교회로 돌아와 주일학교 교사직을 충실하게 감당합니다. 지미 카터의 이러한 활동은 대통령 퇴임 후 그의 나이 56세부터 시작한 것으로 노년의 인생을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노년의 삶은 제2의 인생의 삶으로 남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저서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카터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 것인가? 걱정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이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주변에 눈을 돌리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6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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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말씀대로 사는 길 | 2015-03-07 |
| 51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 | 2015-02-08 |
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항거하는 사람들, 반항자)라고 불렀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위그노”(Huguenot-동맹 공동체의 사람들)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는 칼빈이 프랑스 사람이기에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칼빈주의 사람들입니다. 16세기 프랑스 왕들은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개신교 신자들을 심하게 핍박했고 집단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밀고하면 그들의 전 재산을 몰수 했습니다. 이때 밀고자에게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주는 법률까지 제정하여 조직적으로 개신교 신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결국 1562부터 1598년까지 36년간 프랑스에서 끔찍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영국은 개신교를 지원했고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원하므로 전쟁이 더욱 가열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개신교와 가톨릭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전쟁은 1598년 낭트칙령을 반포하면서 끝이 납니다. 36년간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은 것은 예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은 프랑스 위그노의 예배의 자유는 루이 14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폐지됩니다. 1685년 루이14세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를 부르짖으면서 낭트칙령을 폐합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조국을 버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됩니다. 당시 30만 명이나 되는 이들은 상공인들로 제철, 염료, 화학분야의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특별 이민법을 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은 이들을 받아들여 공업 기술력을 향상시킵니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들은 서부개척의 총포와 화약분야의 권위자들이 됩니다. “위그노(Huguenot)”, 프랑스 개신교 신앙동맹공동체 사람들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술 분야의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위그노의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이들이 피 흘려 쟁취한 예배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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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위그노(Huguenot)의 후예들(2) | 2015-02-15 |
지난주에 이어 위그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글을 씁니다.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자들을 우리는 “위그노” (Huguenot-동맹 공동체의 사람들)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개신교 칼빈주의 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등장으로 “낭트칙령”이 폐지되고 박해가 다시 시작되자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 미국 등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탈출을 감행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직업소명”을 믿는 자들로 기계, 제철, 염료, 화학, 모직 등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인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찰스 2세는 당시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위그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민법에 의하여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영국의 기계공업과 면방직 공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증기기관을 발전시켜 상용화 시킨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대표적인 위그노 출신입니다. 이러한 위그노 중심의 기술의 발전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편 스위스로 들어간 위그노들은 제네바를 기점으로 하여 산속 마을인 샤프하우젠과 쥐라 지방에 정착하여 스위스 정밀산업인 시계산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만든 시계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롤렉스, 오메가, 위블로, 예거르꿀뜨르, 파텍필립,등 명품시계 브랜드입니다. 지금도 500개의 시계회사에서 3만 명의 장인들이 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제네바 뒷골목에 소규모 은행을 열었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거래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재산형성 과정과 예금액 등을 알 수 없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거래원칙이 오늘날의 2500조의 스위스 비밀은행이 된 것입니다. 유럽으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이라는 <직업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위그노가 믿던 칼빈주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위그노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직업소명>의 의미를 깨달아 열심과 충성을 다하면 각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위그노 신앙의 후예>답게 모든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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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스완슨 선교사를 부르신 하나님 | 2015-02-23 |
1952년 6.25 전쟁이 한참이던 겨울 어느 새벽에 서울 거리를 거닐던 미국인 선교사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은 길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치우는 인부들의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쟁 중에 아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는 서울 거리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스완슨 목사님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자고 호소합니다. 그후 40년 동안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켐패션(Compassion)운동을 전개하여 미국 크리스찬의 후원으로 10만명의 한국의 전쟁고아와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끼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의 켐패션 운동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어린이에게 <꿈을 잃은 어린이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전하는 구호단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후원국이 미국, 영국,독일,캐나다,호주,프랑스,뉴질랜드,이탈리아,스위스,한국등 10개국이며 수혜국은 세계 26개 나라의 어린이 110만 명에게 5100개의 지역교회를 통하여 먹을 것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한국은 지난 2003년에 수혜국에서 후원국이 되었습니다. 컴패션의 비전은 빈곤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영적, 정서적, 사회적, 육체적, 그리고 감성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긍극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함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운영철학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중심(Christ-centered), 어린이 대상( Child-focused), 지역교회중심(Church-based) 재정의 투명성(Committed to Integrity)을 단체의 원칙으로 합니다. 스완슨 선교사 한사람의 시작이 이제는 세계 110만명의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켐패션 운동을 보면서 스완슨 선교사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큰 역사를 이루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켐패션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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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 | 2014-06-15 |
6월은 나라를 사랑하는 달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며 6월6일은 현충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위하여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정치의 일선에 나서서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 자신의 맡은바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그 외에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36년 동안에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사랑을 실천할 때 일본과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또한 후진들을 양성하여 훗날을 기약하는 인재양성의 방법으로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사랑한 김약연 목사님은 함경도에서 만주로 온 집안이 이주하여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인재들을 양육했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이주 동기는 그의 글에 나타난 것처럼 “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주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동명학교에서 새로운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신학문을 배운 정재명 선생을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정재명 선생은 부임조건으로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칠 것과 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재명 선생이 부임하면서 명동학교는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고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동휘 선생이 이곳으로 오면서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무력 탄압 속에서도 만주의 교회는 성장하여 1921년에는 105곳의 교회가 있었고 교인이 6천3백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명학교 출신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선생과 시인 윤동주 선생이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자신의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도 나라사랑의 방법입니다. 특히 훗날을 위하여 인재양성에 전심전력하는 것도 나라 사랑의 방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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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잔인한 4월을 보내면서 | 2014-04-27 |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온 국민이 아파하는 세월호의 침몰을 바라보면서 슬픔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분노로 표출 되고, 욕설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광장에 나가 나쁜놈, 죽일놈, xx놈들 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목사라는 체면 때문이랍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바르지 못한 것에 동조하고 불의에 눈감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데.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가 가슴에 메아리쳐 옵니다.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RMS Titanic)호는 첫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하여 북대서양에 침몰하였습니다. 당시 1,514명이 사망하였고 구조된 사람은 710명 정도였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은 존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배가 침몰할 때 마지막까지 조타키를 잡고 그대로 서 있다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스미스 선장의 고향 리치필드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의 동상 앞에는 “Be British(영국인답게 행동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선원들에게 마지막 한 말입니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은 죽음 앞에 비겁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원들은 마지막까지 승객들의 구조에 열심을 내었고 선장의 지시에 의하여 어린이와 여자를 먼저 구멍보트에 태웠습니다. 이것은 바다의 법칙(the rule of the sea)이라 하여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승객들 먼저, 그리고 선원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선장이 배에서 내립니다. 이러한 전통은 해양인들의 시맨쉽(Seamanship)이 되었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에 놔두고 자신들만 살려고 탈출했으니 시맨쉽(Seamanship)을 저버린 비겁한 행동입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이 없는 황무지와 같은데 눈치 없는 봄은 대지에 비를 뿌리고, 라일락 꽃을 피우는 모습에 역설적으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꽃다운 아이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 버려진 채 돌아올 소식이 없는데 창밖의 새들은 눈치 없이 노래하니 너무나 잔인한 4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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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아름다운 동행 | 2014-04-20 |
1907년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은 서경조,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한석진, 양전백입니다. 이들 7명은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됩니다. 이들 7명이 목사안수를 받기까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분들은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에 속한 선교사님들이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이들을 가르치면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을 때 소속을 어느 나라 장로교에 두느냐였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선교 본부에서는 선교업적 때문에 무조건 자신들의 소속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사님들은 이 문제를 놓고 2년간 기도합니다. 기록에 보면 목사안수는 1907년인데 회의는 1905년부터 시작합니다. 선교사님들은 모두가 각자의 주장을 내려놓고 조선 장로교는 하나로 한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봅니다. 당시 선교사님들은 선교 업적을 놓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국의 선교 본부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하나의 장로교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오분 사열되어 서로 싸우는 꼴이 되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님들의 열정과 하나의 장로교회를 만들려는 역사 인식은 사라지고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며 분열되는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초 목사안수를 받은 7인중 양전백 목사님은 평안북도 선천읍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셨는데 얼마 후 후배인 김석창 목사(4회졸업)가 목사안수를 받자 선천읍 교회를 남교회와 북교회로 분리하여 선천읍에서 함께 목회를 하셨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교회를 분리한 것입니다. 또한 양전백 목사님과 김석창 목사님은 함께 힘을 모아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세워 한국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두 분 목사님이 함께하여 세운 신성학교 출신들을 보면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 서울대 총장 장리욱 박사, 경북대 초대총장 고병간 박사, 의사인 장기려 박사, 차병원의 차경섭 박사, 사상계의 장준하 선생, 총신의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세문안교회의 차재명 목사, 영등포교회 원로 방지일 목사, 세브란스 병원장 문창모 박사, 보이스카웃 창설자 이태환 박사, 등 너무나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습니다. 싸우는 것 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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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청빈의 마음 | 2014-04-13 |
1481년 성종 12년에 처음 편찬된 조선시대의 지리책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국(東國)은 중국 동쪽에 있는 나라 조선을 말하며 여지(輿地)는 지리(地理)를 뜻하며, 승람은 ‘모두 볼 수 있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차례 개정 작업을 통하여 1530년(중종 25)에 원본에 신증(新增)이라 표시를 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덩이를 던진 나루터라는 뜻의 투금탄(投金灘)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지금의 행주대교 근처의 양천나루터입니다. 이 나루터에 이억년(李億年)과 이조년(李兆年)이라는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형제는 강변에서 금덩이 두 개를 주어 서로 한 덩이씩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금덩이를 가지게 되자 형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고 형이 가진 금덩이에 욕심이 생겨 자신의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도 형제의 우애를 생각하고 자신의 금덩이를 강에 버립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곳의 이름을 투금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1902∼1968)이 쓴 소설중에 <진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입니다. 키노와 조안나는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서 크고 값진 진주를 발견합니다. 이들 가난한 부부가 진주를 소유하게 되자 주변사람들이 찾아와 친절을 베풉니다. 그런데 그 친절 속에는 진주를 탐내는 마음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밤중에 강도가 들어와 진주를 빼앗아 가려하자 그들과 격투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 중에 진주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진주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멀리 사라지고 오히려 불행한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배를 타고 깊은 바다에 나가 진주를 던져 버립니다. <투금탄>의 두 형제와 <진주>를 바다에 버리는 부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해하는 청빈의 마음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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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하늘나라 비자(visa) | 2014-03-16 |
한국의 어느 젊은이가 2007년 12월부터 2009년10월까지 690일간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하고 나서 여행 개요를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총 39개 나라 방문, 총 이동거리 6만4천Km, 교통비 515만원, 숙박비 354만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39개 나라를 여행 할 때 2개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국허가서인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무비자의 2개 나라를 제외하고 비자 발급 총비용이 200만원이나 들었습니다. 비자 발급비용이 가장 비싼 나라는 수단으로 145달러 한화 17만정도 들었고 가장 싼 나라는 말리로 3500원 정도였습니다. 교통비가 515만원 들었는데 비자발급 비용이 200만원 들었으니 여행 총 경비 중에 비자비용이 너무 많이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려면 먼저 방문하는 나라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받는 입국허가서를 비자(visa)라고 합니다. 비자(visa)는 라틴어의 vise가 어원이며, 이는 배서하다, 보증하다, 증명하다, 사증(査證)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각 나라에서 스파이의 입국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발된 제도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자 없이 6개월은 자유롭게 여행하는 무비자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목적이 아닌 공부, 사업, 취업등 장기간 체류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합니다. 비자를 받기위하여 서류를 제출할 때 비자신청 비용이 160달러(20만원)나 됩니다. 이 비용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각 나라에 방문하려면 먼저 그 나라에서 방문해도 좋다는 입국허가서인 비자(visa)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나라, 하늘 나라의 입국허가 비자를 받아야합니다. 미국 비자 비용 160달러, 아프리카 수단 145달러, 그렇다면 하늘나라 비자비용은 얼마나 할까? 그리고 어떻게 받아야할까? 하나님나라 비자 발급 비용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다만 비자 발급 과정에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밷후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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